사대부가문의 전형 민칠식 고택, 한옥체험 ‘백제관’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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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가문의 전형 민칠식 고택, 한옥체험 ‘백제관’ 운영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1.14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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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의 재발견-선비정신과 공간의 미학,

문화관광자원화 방안의 지혜를 읽다<10>
▲ 부여 중정리의 민칠식 고택은 돌출된 날개집의 형태가 특이하다. 부여군에서 하옥체험을 할 수 있도록 ‘백제관’으로 꾸몄다.

‘숭정 87년’ 1705년 명문 기와 발견, 1829년에 보수한 기록
부여군, 2004년 토지·가옥 매입, 2009년 한옥체험시설 운영
‘ㅁ자’ 형태 고택, 뒷면 좌우로 길게 삐져나와 있는 ‘날개집’
사랑채·중문채·안채 하나로 구성 충청지방서 드문 구조

 

충남 부여군 부여읍 중정리 537-4번지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92호인 민칠식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나지막한 필서봉의 구릉이 고택의 배경을 이루고 있고, 앞으로는 중정마을 앞의 넓은 뜰이 펼쳐진 곳에 고택이 자리한다. 나지막한 뒷산을 배경으로 널찍한 터에 남향으로 자리 잡은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고택이다. 이 고택의 건립연대를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사랑채 내림마루에서 1705년이 기록된 명문기와가 발견되었고, 안채의 상량문 기록으로 보아 1829년에 크게 보수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전통한옥인 민칠식 고택은 부여군에서 운영하는 ‘백제관’이란 이름으로 최근 한옥체험을 즐기는 관광객들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민칠식 고택 또는 가옥으로 불리는 백제관은 1984년에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전통한옥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사대부 집안의 전통가옥이다. 지난 2004년에 부여군에서 토지와 가옥을 매입해 보수와 수리를 했으며, 현재 원형을 그대로 복원해 2009년부터 부여군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전통한옥 숙박체험시설로 제공되고 있다. 원래 이 한옥은 조선시대 네 분의 왕비를 배출했던 여흥민씨 집안의 삶의 터전으로 이 고택에 살던 민치준은 공조참의(정3품)와 내장원경(황실의 재산관리 총책임자)등의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했다고 전해진다. 원래 용인이씨(龍仁李氏)의 소유였으나 민씨에게 소유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지금은 부여군이 소유하고 있다. 이곳에 민씨가 터를 잡게 된 것은 전 소유주였던 민칠식의 4대조인 민용묵 때부터이다.

민용묵에게는 아들 넷이 있었는데 넷째 아들 민치준이 이 집을 크게 보수했다고 한다. 상량문을 통해 1829년 집을 크게 보수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옥 뒤로 급한 구릉이 있고, 앞면은 마을과 들로 형성되었으며, 마을 앞으로 왕포천이 서에서 동으로 감돌아 백마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현재 백제관의 구조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문간방)로 나뉘어져 있으며, 특히 이곳은 KBS 프로그램 1박 2일을 비롯해 다양한 촬영을 했던 곳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또 주변에는 200여년 이상 된 은행나무, 팽나무, 모과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전통한옥인 백제관의 정취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하며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백제관에서 정림사지박물관, 부여국립박물관, 궁남지, 백제왕릉원, 부소산성 등은 자동차로 5분에서 10여분이면 갈 수 있다.
 

▲ 대문채가 10칸의 ㅡ자형으로 구성돼 있다.


■돌출된 날개집이 특이한 한옥고택
이 고택은 세가 상당했던 양반집 가문의 전형적인 가옥이다. 여름에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한옥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 민칠식 고택은 여흥민씨가 오래도록 강력한 세를 보이며 살아왔지만 쇄락하고 지금은 부여군의 소유로 고택체험관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민칠식 고택은 사랑채 기와에서 ‘숭정 87년’인 1705년이라는 명문 기와가 발견됐고, 안채의 상량문을 보면 1829년에 크게 보수를 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면, 1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솟을대문은 ‘一자’형 모양으로 구성돼 있으며, 그 안으로 정침이 자리하고 있다. 정침의 앞쪽으로는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고, 사랑채에 붙은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중문을 두고 연이어져 있어 ‘ㅁ자’ 형태의 고택이다. 그러나 뒷면이 좌우로 길게 삐져나와 있어, 이런 형태를 ‘날개집’이라 부른다고 한다.

길게 뻗은 대문채는, 좌측에서 5번째 칸에 솟을대문으로 구성을 했다. 밖에서 보면 우측으로 네 칸이 광채와 대문채를 들여놓고, 좌측으로 다섯 칸을 역시 방과 광들을 마련했다. 대문채는 ‘一자’형 맞걸이 집으로 솟을대문을 만들고 양끝을 박공으로 처리했다. 대문채 밖의 담장은 밑에는 돌로 쌓고, 위에는 기와로 문양을 넣었다. 담장의 대문 쪽에는 낮은 굴뚝이 있다. 현재는 한옥체험을 하느라 그랬는지, 광으로 사용하던 일부의 칸을 화장실로 꾸며 놓았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좌측에 사무실을 두었는데, 안으로는 넓은 마당이 펼쳐진다.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 좌측으로 사랑채를 두고 그 옆에 담장을 이어 중문을 냈다. 중문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꺾어 안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중문의 동편에는 사랑채의 아궁이가 있으며, 안채를 들어가는 곳에 다시 중문 안문을 두었다. 사랑채는 앞으로는 세 칸으로 구성했다. 사랑채 내림마루 끝에는 ‘숭정(崇禎) 87년인 1705년’이라는 기와가 있어, 집을 지은 년대가 아닌지 추정된다.

사랑채 앞에는 판석으로 댓돌을 만들어 위엄을 표현했으며, 사랑마당에서 중문간까지도 장대석으로 쌓은 여러 단의 계단이 있다. 사랑채는 마름모형의 주추 위에 네모기둥을 새웠다. 좌측 두 칸은 방을 드리고, 동편 맨 끝 방은 누정과 같이 누마루방이다. 사랑방 앞에는 툇마루를 놓고, 사랑채 서남쪽 모퇴에는 볏광을 뒀다. 사랑의 측면은 두 칸으로 되어 있으며,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갈 수 있는 일각문이 안채와 연결된 담장에 나 있다. 이 사랑채의 특징은 담으로 안채와 연결이 됐으며, 연결 선상이 단지 담장이 아니라, 방과 부엌 등으로 꾸며졌다.

▲ 민칠식 고택 안채 전경.

■낮은 굴뚝, 주인이 청빈한 삶을 추구
중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꺾어서 안채다. 안채는 왼쪽부터 부엌, 큰방, 대청, 작은방, 안마루 순으로 구성된 8칸 집이다. 오른쪽에 돌출한 안마루가 있다. 사랑채는 광과 중문간, 부엌, 사랑방, 마루로 배치했는데, 안채와 비슷한 구조기법으로 안채보다 높다. 안채의 구성은 사랑채를 제하고 나면 ‘ㄷ자’ 형태이다. 동편으로는 사랑채와 맞물리는 일각문이 있고, 일직선상에 놓인 안방의 뒤편에는 담장을 쌓아 보호한 날개채가 있다. 이 고택을 ‘날개집’이라 부르는 연유다. 서쪽 끝에 놓인 부엌은 앞이 개방돼 있으며, 중문채와 구별하기 위해 담장에 일각문을 냈다. 전체적으로는 ‘ㅁ자’ 형태의 구조이며, 사랑채와 중문채, 안채가 하나로 구성돼 있으며, 구분을 일각문으로 한 점이 특이하다. 이런 형태의 가옥은 대개 영남지방의 양반가에서 많이 보이는 형태라고 전해진다.

충청지방에서는 매우 드문 집의 구조이기 때문에, 민칠식 가옥이 갖는 의미라 하겠다. 주차공간도 넉넉한 민칠식 고택은 앞에는 백마강의 지류인 왕포천과 풍요로운 들판인 넓은 뜰이 펼쳐져 있어서 풍요와 멋스러운 느낌마저 든다. 또한 멀리 백마강의 유유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현실에서 고택은 고루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다른 고택과 달리 관리가 잘되고 사람들도 숙박을 해서 그런지 깔끔한 고택의 모습을 고풍스럽게 간직하고 있다. 부여군에서는 이 고택을 부여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이 우리 전통 한옥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한옥생활체험을 할 수 있는 ‘백제관’으로 꾸며 운영하고 있다. 백제관은 사랑채(연청당)를 비롯해 안채(청송당) 등으로 구분되며 화장실과 샤워실, 부엌 등의 현대적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대청마루에서 누워 올려보면 들보 하나하나가 가공하지 않은 자연미를 자랑하고 있으며, 마룻바닥도 정교하게 짜 맞춘 것 등에서 쉽게 우리조상들의 수준 높은 건축기술을 엿볼 수 있다. 이밖에도 대문에서 안채로 들어오는 문에 벽을 만들어 외부인으로 부터 안주인을 배려한 점은 사려 깊은 우리네 조상들의 슬기를 엿볼 수 있다. 특히 굴뚝이 매우 낮게 만들어진 것은 너무 따뜻하게 지내지 않았던 이 고택의 옛 주인이 청빈한 삶을 추구했음을 짐작케 한다. 느리게, 천천히 산다는 것은 그와 반대로 살아가는 요즘시대에 엄청난 모험일 수 있다. 하지만 가끔 느림의 미학을 즐길 때 우리 몸과 마음은 진정한 힐링을 체험한다. 충남 부여는 백제의 땅이다. 백제는 부여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나라는 패망했지만 이곳에 터를 잡은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삶을 이어가고 있다. 콘크리트 속에서 생활하는 현대인들에게 한옥의 흙벽과 나무의 생명력은 즐거움을 넘어 자연으로의 복귀를 외치는듯하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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