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증거 장소요, 최대의 순교 터인 홍주 옥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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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증거 장소요, 최대의 순교 터인 홍주 옥 터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1.1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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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천주교순교성지, 부활을 꿈꾸다 <10>
▲ 과거 홍성법원 및 검찰청 자리에 복원된 홍주옥 전경.

천주교 순교자들 홍주옥에 수감되어 꿋꿋하게 순교의 길로 나가
시복 된 원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순교
127명 순교, 교수형과 옥사 등 113명이 옥중이나 인근에서 순교
홍주관아로 체포 문초와 형벌 뒤 홍주 옥에 갇혀 있다가 처형돼


조선 후기의 ‘홍주 옥’은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한 장소요, 순교를 준비하던 의미 있는 장소이며, 최대의 순교 터다. 홍주의 순교자 중 교수형 100명, 옥사 13명 등 113명이 옥중이나 그 인근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순교자들이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 수 있는 기록은 현재까지 없다. 홍성군청을 마주보고 바로 왼쪽에 있는 구 홍성법원 및 검찰청 자리가 있는데, 이곳이 조선시대 홍주 옥이 있던 장소다. 지난 2009년 홍주성 복원에 따른 계획에 의해 홍성법원과 검찰청은 홍성읍 월산리로 이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홍주성 복원을 위해 건물이 철거되고 공터로 남아있는 자리에 옛 홍주성의 관아 등을 하나 둘 복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홍주 옥이 복원되었고, 당시 먹었던 우물도 복원돼 많은 주민들과 순례자들에게 ‘기적의 우물’로 불리며 인기다. 특히 홍주 옥은 천주교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1791∼1870년대) 홍주관아로 끌려온 천주교 신자들이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굳게 신앙을 증거한 곳이다. 이곳 홍주 옥에 수감되어 꿋꿋하게 순교의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홍주 옥에서 순교한 순교자 세 명 시복
홍주관아로 끌려온 천주교 순교자들이 처음으로 문초와 형벌을 받은 장소는 홍주진영(忠淸道 前營)의 동헌인 경사당(景士堂) 앞과 목사의 동헌인 근민당(近民堂) 앞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전영장의 동헌인 경사당은 지금의 동문인 조양문(朝陽門) 서쪽에 위치한 한국통신 건물 자리로 추정되고 있다.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이곳에 있던 영장의 동헌 앞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았다. 따라서 홍주옥터(옛 검찰청과 법원 자리)는 최대의 순교 터이다. 교회 순교록에 나오는 127명 중에서 교수형 100명, 옥사 13명 등 113명이 이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나타난다. 홍주의 저자거리(지금의 홍성군청 앞)는 순교자들이 관아로 끌려갈 때, 혹은 처형되기 전에 조리돌림을 당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홍주 옥에서 순교한 순교자 중에서 시복이 된 원시장(1732~1793,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1799), 박취득(?~1799, 라우렌시오) 등 세 명이다. 또한 중기박해 때의 이여삼(1770~1812, 바오로), 최대종(1789~1839, 요셉), 병인박해 때의 김선양(1808~1866, 요셉) 부부 등 순교자들이 바로 이곳 홍주 옥에서 순교했다. 1791년 신해박해로 체포되어 이듬해에 홍주지역에서 최초로 순교한 원시장 베드로는 이곳에서 동사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원시장 베드로는 천주교에 입교한 후 사촌 원시보(1730~1799, 야고보)를 찾아 나선 포졸들에게 잡혀 이곳 홍주 옥사에서 세례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갖은 고문을 받았으나 아무리 맞아도 다음 날이 되면 멀쩡해지고 기세가 등등해지자 결국 홍주목사로부터 ‘추운 겨울밤에 온몸에 물을 뿌려 얼려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고, 결국은 동사했다.

또 이여삼 바오로는 극악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10년간이라는 옥고를 치루면서 사형 당하기 전 자기가 자기에게 세례를 주며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또 이곳에서는 박취득 라우렌시오가 1798년 8월에 체포되어 1799년 2월 29일(음)에 순교하였는데,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거의 8개월가량 옥사에 있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를 맞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이들을 ‘기적을 보인 순교자’라고 부르고 있다. 엄청난 매를 맞고 다 죽었다고 옥에다 던져 놓았는데도 슬며시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하자 나중에는 할 수 없이 그 자리에서 새끼줄로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 많은 고문과 매질에 상한 모든 몸이 깨끗해지는 기적을 보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홍주의 순교자는 상당수가 모두 복법(伏法, 처형)으로만 기록되어 있으므로 구체적인 순교의 형식을 알 수가 없다. 교회의 순교자 증언록을 바탕으로 그중 127명의 순교 형식을 구분해 보면 교수형 100명, 옥사 13명, 생매장 4명, 참수 2명, 미상 8명으로 나타난다. ‘교수형과 옥사 등으로 113명이 옥중이나 그 인근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고 대전교구의 홍주·해미 성지 자료집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은 홍주의 공동묘지나 청양의 줄무덤 등에 있기도 할 것이지만 수많은 순교자들이 어디에 어떻게 묻혔는지는 알 수가 없다. 보통 교수형은 구멍이 있는 커다란 돌이나 옥벽에 뚫은 구멍, 또는 널판구멍에 줄을 넣고 순교자의 목을 옭아맨 다음 옥졸들이 반대편에서 줄을 당기는 방법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1866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이곳에서 서산 강당리(강댕이) 출신 김선양 요셉 등 천주교 신자 17명이 이러한 방법으로 순교했다. 죽은 후에 시체는 모두 한 광중에 묻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홍주옥 내부 모습.


■ 홍주 옥에서 순교한 순교자들
◇순교자 원시장 베드로 (1732∼1793년)
원시장 베드로는 1732년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시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났다. 60세가 가까워졌을 때 사촌 형 원시보 야고보와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했다. ‘시장’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본래 성격은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호랑이라는 별명을 들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신앙을 실천해 나가는 동안 성격이 변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사촌 원시보는 다른 곳으로 피신했으나, 그는 체포돼 홍주관아로 끌려왔다. 수없이 매질을 해도 소용이 없자 관장은 그의 몸에 물을 붓고 밖에 내다놓아 얼려 죽이라고 명했다. 베드로가 덮어쓴 물은 이내 얼음으로 변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로지 주님의 수난만을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하며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에게 바쳤으니, 1793년 1월 28일(음력 1792년 12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순교자 방 프란치스코 ( ? ∼1799년) 
방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면천의 ‘여’ 고을 태생으로 감사의 비장(裨將)을 지낸 사람이었다. 교우들 사이에는 ‘방 비장’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우연히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는 누구보다도 빨리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들으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으며, 그들과 같이 순교하기를 간절히 열망하기도 했다. 1797년의 정사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됐다. 그도 다음 해 홍주에서 체포돼 6개월 동안 갖은 형벌을 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그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슬퍼하는 교우 두 동료들도 권면하여 거룩한 기쁨을 같이했다고 전해진다. 그들 셋은 함께 홍주 옥에서 1799년 1월 21일(음력 1798년 12월 16일) 순교했다. 

◇순교자 박취득 라우렌시오 (?∼1799년)
홍주의 면천에서 태어난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한양으로 올라가 지황(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으며,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라우렌시오는 고향의 여러 교우들이 체포돼 옥에 갇히자, 그들을 찾아가 자주 위로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관장 앞으로 가서 교우들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체포됐다가 석방됐다. 1797년의 정사박해 때 다른 곳으로 피신했지만, 아버지가 대신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면천관아에 자수했다. 그는 모두 1400대 이상이나 맞았고, 8일 동안 물 한 방울을 마시지 못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옥졸들은 이제 그가 죽은 줄로 알고 옷을 벗긴 뒤에 밖에 내던져 버렸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나는 굶겨도 죽지 않고 맞아도 죽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목을 매면 죽을 것이오”라고 옥졸에게 말했다 한다. 실제로 이튿날 밤에 교우들이 그에게 다가가서 보니 모든 상처들이 기적적으로 나아서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를 요술이라고 생각한 옥졸이 새끼줄로 그의 목을 졸라 죽였으니, 이때가 1799년 4월 3일(음력 2월 2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약 30세였다. 이처럼 홍주지역에서 순교한 천주교 순교자들은 홍주옥터(옛 법원과 검찰청 자리)와 저자거리(군청 앞 주차장 부근), 북문교 주변 참수터 추정지 등에서 순교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당시에 홍주목 관할 하에 거주하던 천주교 순교자들은 모두 이곳 홍주관아로 체포돼 와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3~4개월에서 8~9개월 동안 홍주 옥에 갇혀 있다가 처형되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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