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부지방 대표적 전통농가, 서천 이하복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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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부지방 대표적 전통농가, 서천 이하복 가옥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1.1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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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의 재발견-선비정신과 공간의 미학,

문화관광자원화 방안의 지혜를 읽다<11>
▲ 목은 이색의 18세손인 서천의 청암 이하복 고택은 조선시대 전통농가의 큰 집 형태를 간직한 초가이다.

학교법인 동강학원·동강중학교 설립서천지역 교육향상에 힘써
전통민가 마지막 시기 조선시대 충청·전라지역에서 널리 이용
사랑채 우측에 아래채 별설 며느리에게 독립적인 공간 할애해
초가의 지붕 용마루에 해당하는 ‘용마름’ 용이란 임금을 뜻해

 

충남 서천군 기산면 신산리에 위치한 ‘서천 이하복 가옥’은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전통농가인 큰집 형태를 그대로 간직한 채 보존되고 있는 대표적인 전통가옥이다. 이 초가고택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197호로 지정되었다. 이 고택은 한산이씨 중시조인 목은 이색 선생의 18대손인 병식(중추원의관)이 19세기말(조선말엽)에 안채 3칸을 짓고 이후 아들이 20세기 초에 사랑채·아래채·웃채 등을 새로 지으면서 안채도 크게 증축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렇다면 이 고택의 주인이었던 이하복(李夏馥, 1911~1987)은 누구인가.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호는 청암(靑菴)이다. 고려 말기 문인이며 학자인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서천군 기산면 신산리 120번지에서 출생해 1928년 한산공립보통학교, 1934년 제1고등보통학교(경기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하여 1939년 와세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인 1939~1943년까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근무하던 중 1944년 일제가 학생들을 강제로 전쟁터로 내 모는 것에 격분해, 학병입대 권유를 거부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광복 후인 1946년 사재를 털어 동강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한데 이어 1949년 12월 30일 학교법인 동강학원과 동강중학교를 설립하여 서천지역의 교육환경을 향상시키는데 힘썼다. 청암 이하복은 1987년 12월 77세를 일기로 타계하기까지 청빈한 삶을 살았다. 1994년 지방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이 추서됐다.

이하복의 초가고택은 조선시대 민가의 전형적인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197호로 지정됐다. 한편 2013년 7월 7일 향년 83세로 세상을 떠난 이하복의 4남 6녀 중 장남인 이기원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도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외교사를 전공한 뒤 서울대·단국대·국방대학원 교수 등을 거쳐 1995년 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 부원장을 끝으로 강단을 물러났으며, 2010년 북한연구소 이사장을 지냈다. 선친의 호를 딴 청암문화재단을 만들어 200년 된 고향의 초가고택(이하복 가옥)에서 살며 동강중학교 이사장을 맡아왔다. 명문가인 이하복 가옥의 마당에 세워져 있는 “왔다 사랑했다 갔다”를 새긴 비석은 청암 이하복의 말씀 중에서, 셋째 딸 순원이 썼다고 한다.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고인의 유지에 따라 비석 대신 자연석에 선생의 말씀을 새겼다’고 전해진다.

한편 사랑채 문 위에 걸려 있는 ‘忠孝傳家(충효전가)’라는 현판은 근·현대 서예의 대가인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1921~2006)의 글씨다. 일중과 여초거사는 형제인데, 청암 이하복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나 보다.

▲ 딸 순원이 쓴 청암의 비문 ‘왔다, 사랑했다, 갔다’.

■검소하고 소박한 조선시대 전통적 민가
이하복 초가고택은 멀리 장군봉에서 이어진 진산이 오른쪽으로 휘감아 우백호를 이루고, 옥녀봉 줄기가 왼쪽에서 휘감아 좌청룡을 형성했다. 지금은 메워지고 없는 큰 연못이 있는 명당 터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또 1000여 평의 대지 위에 안채, 사랑채, 아래채 등으로 구성된 이 고택은 옛 선조들이 불문율로 지켜왔던 풍수지리상으로 형성된 자리라는 점을 뒷받침하고 있는 듯하다. 멀리 화양산을 바라보면서 탁 트인 곳을 향해 나란히 배열한 집인데 수구가 조금 벌어진 것을 막아주기 위해 향나무, 벽오동, 사철나무 등을 가지런히 심어 영역감을 한층 강화한 느낌을 준다. 전통민가의 마지막 시기인 조선시대에 충청지역과 전라지역 등지에서 널리 이용되던 ‘ㅡ자’형 ‘외통형식’으로 솟을동자(방문, 대청문 중방 밑에 모양을 더해주기 위해 치장한 부분)와 같은 필요이상의 재료나 멋을 전혀 부리지 않은 채 전형적인 민간기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매우 검소하고 소박하게 지어진 것으로 유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하복 고택은 19세기 후반에 3칸 안채를 건립한 후 20세기 초에 사랑채·아래채·광채를 지으면서 안채의 좌우측을 덧달았다고 전해진다. 이 고택은 멀리 진산(鎭山)에서 좌우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를 이룬 명형국지(名形局地)에 자리 잡고서 국(局)이 열리는 수구(水口)를 향하여 남서향을 하고 있다. 이 집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앞쪽에 대문간이 있는 ‘一자’형의 사랑채와 뒤쪽에 6칸 크기의 안채와 광채가 튼 ‘ㅁ자’형을 취하고 있다. 사랑채의 우측에는 ‘一자’형의 아래채가 2칸 정도 떨어져 자리 잡고 있다.

안채는 원래 3칸으로 좌측에서부터 부엌 1칸, 안방 1칸, 윗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후대에 부엌을 좌측으로 1칸 늘리고 윗방의 우측으로 대청 1칸, 아랫방 1칸을 증설하였으며, 아랫방 앞으로 헛청(부엌과 헛간) 1칸을 덧달아 내었다고 한다. 안방과 윗방 앞에는 반 칸 폭의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두 방 사이에는 ‘네짝미서기문’을 달아 방을 구분하였다. 대청은 윗방과 아랫방에서 드나들 수 있는 개구부를 내지 않고 전면에만 유일하게 출입문인 쌍여닫이 판장문을 달고 있다. 이러한 ‘간살잡이’는 이 지방에서 가끔 보이는 형식으로 마루방이 일반대청으로서의 기능보다 수납공간으로의 성격이 짙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랑채는 좌측에서부터 대문간 1칸, 부엌 1칸, 사랑방 2칸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방의 전면과 우측면에는 반 칸 폭의 툇마루를 설치하였으며, 방 사이에는 ‘네짝미서기문’을 달아 양분하였다. 툇마루의 좌측 단에는 반 칸 크기의 토광이 마련되어 있다. 아래채는 며느리가 거처하는 곳으로 좌측에서부터 부엌 2칸, 안방 1칸, 윗방 1칸, 광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장대석 외벌대 토단 위에 자연석 덤벙초석을 놓고 모두 방주를 세웠으며, 주상(柱上)의 도리는 모를 굴린 납도리를 사용한 민도리집이다. 상부 가구는 전면의 지붕을 후면보다 길게 하기 위한 2고주4량가(二高柱四樑架 : 半五樑架)이며, 지붕은 우진각 초가지붕이다. 사랑채는 1고주5량가로 안채의 구조기법과 유사하다. 다만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으로 안채보다 축대를 높게 한 것이 다를 뿐이다. 이 집은 사랑채의 우측에 아래채를 별설하여 며느리에게 독립적인 공간을 할애해주고 있는데, 이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내외관습을 지키려는 것으로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적 덕목을 보다 더 잘 지키기 위함일 것이라는 것이 해설사의 설명이다.

 

▲ 사랑채의 일중 김충현이 쓴 ‘충효전가’와 여초 김응현이 대문 위에 쓴 ‘가목재’ 현판.


■왜 초가지붕을 용마름이라고 했을까?
서천의 이하복 고택은 아직까지도 이웃의 온기가 전해지는 초가집이다. 초가집은 가장 정겨운 우리민족의 집, 가옥의 이름이다. 초가집의 역사는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가 없지만 신라시대의 경우 서라벌 안에는 기와집만을 짓게 했던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초가가 전해 내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초가라 하면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집을 말하지만, 원래는 자연에서 채취한 갈대나 억새, 띠 등을 이용하여 지붕을 엮은 ‘새나리 지붕’이 그 원조였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새나리 지붕은 비교적 수명도 길고 깨끗하기는 하지만 재료를 구하기가 힘들어 쉽게 구할 수 있는 짚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농촌에서는 볏짚으로 이은 것이 많다. 그리고 기둥은 소나무, 벽면은 흙을 이용하여 집을 지었다. 볏짚은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 외에도, 단열과 보온성이 우수하여 많은 집들이 짚을 이용하여 지붕을 덮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초가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고들 말한다.

그것은 초가가 주는 작지만 소담한 우리 민초들의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우리는 흔히 초가의 지붕을 새로 올릴 때 용마루에 해당하는 것을 ‘용마름’이라고 하여 머리를 땋듯 엮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용이란 임금을 뜻한다. 아마도 나랏님을 상징하는 용을 지붕 위에 얹어, 그 보호를 받는 것을 상징한 것은 아니었을까? 용으로 지붕을 덮는 것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었을 것이다. 그 예로 궁의 임금숙소나 왕비의 숙소를 보면 그 곳에는 용마루가 없다고 전해진다. 한 지붕 안에 두 마리의 용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즉 임금이 용이기 때문에 용 위에 또 용이 군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모든 가옥의 지붕 중앙의 가장 높은 곳을 용마루, 혹은 용마름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의 표현이었으리라는 추정이다.

이제는 단순히 서민을 상징하고, 가난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그 안에서 찾는가 하면, 좀 더 우리답고 멋스러움을 찾는 것이 초가집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최근의 사람들 일부는 건강을 생각하면서 황토로 벽을 올리고 이엉을 엮어 용마루를 튼 초가집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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