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의 발상지 왜, 하필이면 홍주 땅 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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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 발상지 왜, 하필이면 홍주 땅 이었을까?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2.09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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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25>
▲ 홍주의사총에는 900여명이 넘는 홍주의병들의 넋이 잠들어 있다.

의병운동은 국가위기에 민중이 일으킨 구국운동의 대표적 형태
1910년 이후 의병, 독립군·광복군으로 연결 해외에서 독립투쟁
홍주의병 홍주목에서 1905~6년에 걸쳐 전개된 일련의 의병투쟁
홍주성전투 사망한 의병 수 최소 1000여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


의병이란 국가 유사시에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의용병이다. 근대 한국의 의병은 일제 침략에 대항한 무력 항쟁의 대표적 세력으로 주로 유생, 전직 관료, 해산 군인 등이 지도부를 형성하였고 농민, 하급 군인, 도시 빈민층 등이 그 하부 구성원이었다. 한말 초기 의병 운동의 중심 세력은 이항로의 사상적 계보에 속하는 유생 의병으로, 이들은 개항기 개화에 대한 반대적 입장에서 척사 위정과 창의 호국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항로, 최익현 등의 지도로 전개된 초기의 의병운동은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경제·정치·문화적 침략에 반대하는 운동이었고 대내적으로는 무너지는 봉건 사회를 재정비, 강화하려는 복고적인 운동이었다. 의병운동은 1894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났다. 이는 아관파천 이후 일본 세력의 후퇴, 김홍집 내각의 붕괴, 국왕의 조칙에 의한 단발령의 중지와 함께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이 내려짐에 따라 대부분 종식됐다.


■ 의병운동은 저항정신 표출한 점에 큰 의미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외교권이 박탈되자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강원도 지역에서 발원하여 충북·경기·경북으로 파급되었던 2차 의병 운동은 반침략적·반봉건적 성격을 지녔다. 특히, 호남과 충청도 지방의 의병장이 유생 출신으로서 대중적인 봉기와 굳게 결합될 수 없는 요인을 지닌 반면, 영남 지방은 평민이 의병장이었기 때문에 농민을 비롯한 대중을 의병부대로 규합하여 이들과 밀착된 가운데 완강하고 기동성을 띤, 과감한 투쟁을 지속할 수 있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정미 7조약의 체결로 통치권의 대부분이 일본에 넘어가 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제3기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이때에는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으로 합류하고 평민출신이 의병대장으로 가담함으로써 의병운동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왔다. 1907년 8월 1일 한국 군대의 해산식에서 서울시위대의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한 것을 계기로 서울시위대의 항전은 시가전으로 번졌다. 이어 원주와 강화에서도 봉기·항전하여 군인들이 의병 대열로 참가했다. 이는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돼 항일 의병투쟁에 새로운 전환을 가져왔다.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 1910년 이후부터 이들 의병은 지하로 스며들거나 만주·러시아 또는 구미지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 독립군 또는 광복군으로 연결돼 해외에서의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의병운동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민중이 일으킨 전통적 구국운동의 대표적 형태로 우리 민족의 강인한 저항정신을 표출한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보호국 체제하에서는 국권 회복을 위한 무장투쟁을 주도했고 식민지 체제하에서는 항일 독립전쟁의 기반을 마련해 항일운동사에 큰 맥을 형성했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하여 처절한 무장투쟁을 전개한 점에서 세계 약소민족의 독립 운동사에도 큰 의미를 가진다.
 

■ 홍주의병의 사상적 기반은 위정척사론

의병을 ‘국난을 당해 정부의 부름을 받지 않았어도 일어나 외적에 대항하는 자’로 규정하는 것을 보면 오늘에는 주권의식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자존의식’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의병정신은 현재에도 면면히 살아 움직여야 하는 정신사의 흐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홍주성이 일본군의 정규군에게 함락할 당시 의병들 가운데 130여명이 포로가 됐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겠다. 이렇듯 홍주의병이란 홍주목의 관할 영역에서 1905~6년과 1906년의 2차에 걸쳐 전개된 일련의 의병투쟁을 말한다.
홍주는 충청서북부에서 국가적인 중요한 상황이 전개될 때, 예를 들면 조선시대에는 반역이 있었을 때나, 구국의 투쟁을 전개할 때면 언제나 그 중심에 서있었다. 그것은 조선시대의 홍주목이 차령산맥의 북쪽에 해당한 군·현에 대한 지방행정의 중심지였고, 홍주목 관할의 군·현이 곧 부보상의 유통경제권 이었으며, 종교적으로도 수덕사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교구가 형성되는 등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공통의 속성을 많이 가진 생활영역이었다. 또한 이곳은 사상적으로도 남당 한원진의 학맥을 이어가는 호론의 중심부였다. 따라서 홍주의병에 가담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홍주목 관할 하에 살고 있었다. 그 예로 제1차 홍주의병과 관련된 사람들의 출신지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김복한, 전태진은 홍주군, 이설은 결성군, 안창식, 안병찬, 채광묵, 임한주 등은 홍주군 화성면(현 청양군 화성면), 박창로는 예산군, 송병직은 홍산군, 이식, 이봉학, 김정하, 정제기 등은 청양의 정산 출신이었다. 제2차 홍주의병과 관련된 사람들의 출신지 역시 민종식은 정산, 이세영은 아산 출신으로 청양에 거주했다. 성재한, 곽한일은 아산군, 이근주는 덕산, 이용구, 이남규는 예산군, 유준근은 보령군, 문석환은 서천군, 김상덕은 서산출신으로 보령에 거주했다. 홍주의병은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어 가는 상황에서 구국의 선봉대 역할을 했다. 따라서 홍주의병이 거병할 때면 언제나 국가에는 일제가 저지른 만행으로 인하여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홍주의병의 사상적 기반은 일반적으로 성리학의 의리론과 이단론에 입각한 위정척사론에서 찾을 수 있다. 위정척사론이란 성리학을 신봉하는 보수적인 유생들이 외세의 치무에 주체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정부의 개화정책을 대한 위기의식에서 비롯됐다. 따라서 위정척사운동 역시 외세의 침투에 따라 단계적으로 전개가 됐다. 그 과정은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서양문물배척과 통상에 대한 반대였다면,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체결 시에는 왜양일체론에 따라 그 대상이 서양에 일본까지 확대가 된 상황이었으며, 이후 1881년 황쭌센의 ‘조선책략’이 유포되는 상황에서는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정치적 움직임으로 확대돼 개화와 보수의 두 세력으로 대립과 갈등을 반복했다. 따라서 홍주지역의 유생들은 남당 한원진의 호론을 중심으로 하는 척사론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에 관해서는 홍주의병에 가담한 김복한, 이설, 임한주 등이 스스로를 남당의 학통을 이었다고 여기고 있었으며, 이외에도 예산의 윤봉구, 서산의 김한구, 광천의 최징후 등은 호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원진의 호론에서 출발한 위정척사운동은 홍주 일대의 유생들에게 전수돼 생사를 초월한 의병투쟁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주 일대에는 위정척사론을 고조시킬 수 있는 상황이 계속됐는데, 1868년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시도사건과 1871년에 세워진 대원군척화비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 홍주의사총 표지석

■ 홍주의사총 1000여명의 열혼들 잠들다

대한매일신보 1906년 6월 6일자 ‘홍주참경’제하의 기사에 “일본은 홍주의병을 작파하기 위해 ○○의 일본대가 연합공격을 행하여 홍주 동문을 타격 파과함에 의병과 거주민이 각각 이리저리로 도망하여 혹은 총에 맞고 혹은 스스로 밟혀 다라와 허리가 부러져 죽은 자의 수효가 천여 명에 이르고 붙잡힌 자가 수백 명인데 창의대장 민종식은 황망한 지경에 도우는 자가 별로 없자 이에 뒤를 보이며 도망하였다더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 보도는 사방이 포위된 아수라장에서 의병과 민간인 1000여명이 사망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보도는 당시 일제가 홍주성에서 자행한 작전방법이 초토화였던 점을 감안하면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닐 것이라는 추론이다. 홍주성의 의병 수는 최소 1000여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홍성천변에서 발견된 유골들은 누구의 것이며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홍주900의총’은 1949년 식목일에 홍성천변에서 발견된 유해가 얼마나 많았기에 900여개는 충분히 넘은데서 붙여진 이름일터이니. 당시 유해발견과 함께 동곳과 풍잠이 서너 되 출토되었다고 전해진다. 군수실에 보관하다가 6·25한국전쟁으로 인해 유실되었다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풍잠’이 나왔다는 것은 ‘홍주구백의총’에 묻힌 의병들 다수가 유림계층이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홍주의병의 순절자도 ‘구(九)’라는 숫자가 ‘최고 많음’을 나타내는 숫자이기 때문에 정확한 순절자의 숫자를 파악하기에는 아직도 한계가 있겠다. 왜, 하필이면 홍주 땅이 어떻게 해서 의병의 발상지가 됐을까? 유생이 많은 곳은 국토의 다른 곳에도 많았을 것이고, 또 의기(義氣)가 탱천한 곳도 다른 곳에도 많았으련만…. <끝>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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