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성 북문교 인근 월계천변은 참수의 형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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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 북문교 인근 월계천변은 참수의 형장이었다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2.1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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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천주교순교성지, 부활을 꿈꾸다 <13>
▲ 홍주순교성지 춤수순교터. 소향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근처로 추정되고 있다.

피형자의 목을 절단해 사망에 이르게 하는 형벌이 참수형
소향천·월계천의 합수머리 지점에서 처형했을 것으로 추정
홍주성 북문, 월계천변 1801년 황일광 참수형을 받은 장소
김대건 안드레아, 천주교 박해 당시 칼로 참수형을 집행해


한국의 천주교는 200년을 훌쩍 넘기면서 모진 박해 속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신자가 목숨을 바쳤고, 이들의 순교를 기리는 성지가 전국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참수형과 생매장 순교 터가 있는 성지는 형벌의 고통이 서린 곳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참수(斬首)란 살아있는 생명체의 목을 절단하여 동체와 두부를 분리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사형을 집행하는 방법의 하나. 뜻은 ‘벨 참(斬) 머리 수(首) 형벌 형(刑)’으로 집행자가 날붙이(칼, 도끼 등)로 피형자의 목을 절단해서 사망에 이르게 하는 방식이다.
현대에는 극소수의 나라를 제외하곤 시행되지 않는 방식이지만 과거에는 천주교 신자 등에 행한 꽤 빈번하게 사용된 방법이었다. 주로 공개처형에서 쓰인 듯한 형벌이 참수형이다. 통념과는 달리 사람의 목뼈와 근육을 단번에 자르는 일에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 긴장해서 중심이 흐트러진다든가, 도구의 날이 무디다든가, 조준을 잘못해서 엉뚱한 곳을 친다든가 하면 단번에 죽지도 못하는 괴로운 사태가 일어나곤 했다고 전해진다.
사형집행 방법을 잔혹하게 하기는 어려운데 사형은 최대한 잔혹하게 집행하고 싶을 때는, 일부러 경험이 없거나 실력이 떨어지기로 소문난 집행자를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경향은 계속 이어져 사형이 비공개 교수형으로 바뀐 뒤에는 가장 죄질이 무겁고 가장 많은 사람을 살해한 사형수의 형을 맨 마지막에 집행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고 한다. 눈앞에서 죄질이 가벼운 사형수가 먼저 매달리는 것을 보여줘서 공포를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한반도나 중세 유럽이나 대여섯 번의 칼질 끝에 고통 받다 죽은 피형자의 기록도 있으며, 피형자의 가족들은 사형집행인에게 일격에 보내 달라며 돈을 주거나 사형수가 사형대에 올라갈 때 집행자에게 쥐어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반대로 권력자가 죄수를 너무 미워해서 경험 없는 집행자에게 목을 치게 하거나 녹슬고 이 빠진 칼, 도끼를 쓰게 하는 일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홍주성 북문교 인근 월계천변의 참수 터

홍주의 순교 터인 처형장은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형을 받은 장소다. 홍주성의 북문 밖, 지금의 홍성읍 오관리에 소재한 북문교 인근의 월계천변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향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지점에서 죄인들을 처형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곳이다. 홍주순교성지는 기록상으로 211명(또는 212명)의 순교자와 700여 명의 무명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순교자가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홍주성 안에는 순교자들이 갇혔던 감옥(증거터)이, 홍주성 밖에는 교인들이 참수 당했거나 생매장당한 순교터와 매장터 등 3곳이 공존한다.
이곳에서 순교한 충청도의 첫 순교자 원시장(베드로)을 비롯해 방(프란치스코), 박취득(라우렌시오), 황일광(시몬)등 4명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돼 시복·시성됐다. 한편 홍주순교성지의 특징은 첫째 예비자들의 모범 성지이며, 둘째 박해 초기부터 말기까지 순교자가 나온 곳이며, 셋째 한국 천주교회의 핵심 성지라는 특징이 있는 곳이다. 첫째, 천주교에 입교하여 2년간 예비자로써 수계를 지키며 선교한 원시장(1732~1793, 베드로)은 신해박해 때 옥에서 세례를 받고 동사(凍死)로 순교했고, 장장 22년 동안 예비신자 생활을 하며, 거의 10년 넘게 옥살이를 하다가 순교하기 직전 자기가 자기에게 세례를 주고 하느님을 영접한 이여삼(1770~1812, 바오로)은 바로 ‘예비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둘째, 1791년 전라도 진산 사건 때 내린 전국 천주교 신자 검거령으로 홍주에서 원시장 베드로가 충청도에서 첫 순교자가 되면서 정사박해(1797년),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까지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다. 셋째, 홍주는 내포의 중심지로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이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세례를 받고 여사울에서 첫 선교를 시작한 후 내포 지역의 수많은 신자들이 홍주목에서 순교하게 됨으로써 핵심 성지로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사는 200년 역사 가운데 전반부 100여 년은 물론  일제강점기 치하와  한국전쟁 그리고 군사독재 시절 등 근현대사 전체가 가히 순교와 박해와 고난과 수난사로 점철된 순교사라 할만하다. 유명 무명의 순교자가 1만 명인지 2만 명인지 헤아릴 길이 없다. 증거적 자료가 남아있는 극히 소수의 순교자와 증거자들을 대상으로 시복시성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시복시성을 기뻐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어둡고 어려운 시절 순교자보다는 배교자가 더욱 많았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홍주순교성지의 또 다른 순교 터인 참수형 처형장은 1801년의 황일광(黃日光, 1757~1801, 시몬)과 1868년의 유 마르타(1803~1868, 교수형의 가능성도 있음)가 참수형을 받은 장소는 홍주성의 북문 밖, 지금의 홍성읍 북문교(일명 덕산통) 인근의 월계천변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합수머리 지점은 본래 북문교 아래쪽이었는데, 훗날 도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북문교 위쪽이 되었다고 한다.
옛날 홍주의 관리가 홍주성 북문(북문교 남쪽 60~70m 지점) 옆의 치(雉)에 올라가 신호를 하면 그 신호에 따라 월계천변으로 끌고 간 죄인을 참수형에 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바로 그 치가 있던 곳은 지금의 북문 밖 월계천변에서 가까운 북문교 하류 200m 지점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원래 북문은 역대 목사들이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해 오던 곳으로, 갑오동학란 때에는 동학군들을 여기에서 처형했던 것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 홍주순교성지 참수터 순례길

실제로 이곳은 일반적인 참수(斬首) 형장의 조건인 개천과 백사장이 있으며,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장소 등 형장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1866년과 이후 2년 동안 이곳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잡혀 순교했는데, ‘치명일기’에만도 83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조양문으로 끌려 들어온 많은 천주교 신자들은 홍주아문의 뜰 안에 있는 느티나무 등에 묶여 있다가 동헌으로 끌려가 심한 문초를 받아 죽기도 했으며, 옥에서 굶어 죽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죽은 시체는 홍주성 밖으로 내다 버려졌던 것이다.
천주교홍성성당 최일운 전 사목회장에 따르면 “천주교에 있어서 참수형을 당한 신자로서는 정약용의 형인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를 들 수 있겠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신유박해 때 순교할 당시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는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다’며 드러누워서 참수형을 당한 동서고금을 통틀어 드문 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말이다. 일설에 의하면 기세에 눌린 망나니가 한참을 쭈뼛거리다가 칼을 내리쳤더니 목이 반쯤 끊어졌는데, 이 상태에서 벌떡 일어나 땅바닥에 성호를 긋고 다시 드러누워 형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조선의 마지막 지나가던 선비였던 것이다. 물론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으면 안 되겠고, 한국 가톨릭의 전설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또한 김대건 안드레아는 천주교 박해 당시 참수형을 당했는데, 당시 천주교 신자들에게 경고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일부러 날이 들지 않는 칼로 참수형을 집행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수차례 칼질 끝에 참수형이 집행됐고 끔찍한 고통을 겪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 순교자 황일광 시몬 (1757∼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황일광 시몬은 천한 신분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아주 어렵게 생활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792년 무렵, 홍산 땅으로 이주해 살던 중에 우연히 이존창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동생 황차돌과 함께 고향을 떠나 멀리 경상도 땅으로 가서 살았다. 천주교 신자들은 황일광 시몬의 사회적 신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를 애덕으로 감싸주었다. 1800년 2월 황일광 시몬은 경기도 광주의 분원에 살고 있는 정약종 회장의 이웃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황사영(알렉시오), 김한빈(베드로) 등 여러 천주교 신자들과 자주 교류했다. 이후 정약종 회장이 한양으로 이주하자, 황일광 시몬도 동생과 함께 한양의 정동으로 이주한 뒤 땔나무를 해다 팔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돼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이를 굳건하게 참아냈다고 한다.
그 결과 황일광 시몬은 다리 하나가 부러졌으며, 으스러지도록 잔인하게 매질을 당하고 고향으로 보내 참수하도록 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황일광 시몬은 고향인 홍주로 이송돼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던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고 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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