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고 느낀 걸 쓰는 거, 그게 시(詩)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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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고 느낀 걸 쓰는 거, 그게 시(詩)여”
  • 취재=김옥선/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09.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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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이 역사다-당신의 자소서<12>
조인호 1931년생으로 예산군 봉산면에서 태어나 홍동면 수란리로 이사를 왔고, 스무 살에 신기리로 시집왔다. 젊어서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틈틈이 글을 써 시인으로 데뷔해 ‘천국 가는 고향길’ 시집을 냈다.

1931년 동갑이야. 중매지. 홍동핵교 다녔거든. 일본말로 가께꼬미, 다께라는 건 대나무고 하나는 마쓰구미, 솔나무를 상징한거야. 솔하고 대나무가 항상 푸르잖아. 그렇게 만들었어. 일본 사람들이. 나는 마쓰꼬미, 할아버지는 다께꼬미. 핵교에서 일본말만 배웠지. 한국어는 3학년 때까지 잘해야 일주일에 한 세 시간도 못 배더니 나중에는 1시간, 그것두 고만 두더라구. 그러니까 애들이 한국어는 하나도 못 배우고 일본어만 뵈는디 그것도 삼 학년까지만 했어. 그 뒤로는 완전히 일본말로만 살았어. 나는 우리 아버지가 독립운동하시고 활동을 하시니까 아버지한테 한국어를 배웠어. 이게 우리 아버지 필적이유. 마지막에 이 편지 받고 보름도 못 돼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 덕산에서 괴산 쪽으로 가는 버스한테. 논에 가시다가. 여기 홍성의료원에서 장례했어. 우리 아버지가 글씨도 잘 쓰시고 학식도 높으시고 아버지가 이름을 세 가지나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 난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왜 이렇게 이름이 셋이나 되나 몰랐거든. 나중에 나보고 밝히지는 안했는데 생각해보니 독립운동 하시니까 가명을 쓴 거지. 덕산에서는 조선관이라구 허구, 조봉익이라고도 하고 여기 와서는 우리 돌림자로는 조재웅.

내가 커서 생각하니 독립운동 하면서 일본 경찰 피해 다니느라 몇 번 잡혔였댜. 저기 윤봉길 의사 사당 있는데서 내 고향이 어디냐 하면 덕산서 당진 쪽 가는 길 있잖아요. 덕산 읍내서 조금 내려가면 효다리라는 다리가 있어요. 고기서 우리 집이 잘해야 몇 발자국 안 갔어. 행길가가 우리 집이었어요. 그 때 나이 네 살인가 다섯 살인가 그랬는데 지금도 기억이 나요.

우리 집이 철나무 솔가지로 울타리하고 수수댕이 쫌 섞어서 지금도 아련하게 생각나. 울타리 싹 하고 초가집 하나가 있었고 마당 가시에 큰 나무도 있었고 나 다섯 살 먹었을 때 아버지가 독립운동 하셨나봐.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무식해서 넘의 나라 침략 받았다고 제 이름자도 모르고 무슨 말을 해야 말이 통허덜 안 혀. 너무 무식해서 나라가 뭔지 독립이 뭔지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압질을 해도 이게 왜 이런지 그것조차 몰르고 사니까 우리나라가 우선 배워야 한다, 그래 윤봉길 의사 선생이랑 배우고 똑똑한 분들이 모여서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여자 남자 와서 야학을 가르쳤어. 지금도 윤봉길 의사가 가르치던 야학터가 있대. 지금 가보면 에구, 우리 아버지도 저기서 이런 일을 하셨지, 하면 눈물이 나드라구.

일본 경찰이 오믄 암호가 있어. 새가 짹짹 한다든지, 쥐가 찍찍한다든지 이상한 말들을 하면은 온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야. 야학 가르치다 바깥에서 그 소리가 나면 후문으로 나가 막 도망치는거여. 근데 우리 아버지께서는 지금으로 말하면 참 잘 생겼어. 몸은 여리여리한데 아주 약한 몸은 아니고 아주 짱짱해서 키도 알맞게 크고 인물도 나 같지 안 혀. 얼굴이 약간 갸름하고 탤런트 모냥 이쁘게 생기고 코도 미남으로 새하야 말겋고.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가 늦둥이로 낳어. 7대 독자여. 우리 아버지도 못 낳을 줄 알았는디 고모만 셋 낳았는데 둘은 죽고 하나만 살았어. 늦게 마흔 넘어 아들 하나 생긴 게 우리 아버지였어.

아버지가 독립운동 하시고 명단에 못 올라갔나 봐유. 크게 일본 사람들한테 고문 당한거는 읎고, 윤봉길 의사처럼 크게 당하믄 역사에 나오고 그러는데 아버지 같은 사람은 도망을 잘 했대요.

 전에는 우리 할아버지가 옛날에 고생 많이 하셨는데 지독하게 일을 해서 모아갔고 논 한 섬지기, 그 때로는 부자여. 그 앞에 2000평 짜리 기다란 밭. 오죽허면 마누라를 잊어버린다고 했댜. 마누라는 이쪽 끄트머리 밭을 매고 남자는 저기 있는데 마누라가 도망갔댜. 그래도 몰랐댜. 그런 밭이여. 그런께 부자지. 식구는 읎구 그러니께 우리 할아버지가 옛날에 굶어서 부황 놔주고, 애기 낳고 먹을 것 읎어서 하는 사람, 병들어 죽고 허면 너무 불쌍허니께 몰래 방아 쪄서 쌀 서너말 허구 미역 사서 옛날엔 집들이 허실하잖어. 지금같이 대문이 딱딱 있는 게 아니니. 몰래 싸리문 속에 넣어주고 이름도 안 밝히고, 마을 근처에 굶는 이들 있으믄 그렇게 좋은 일을 허셨대유.
 

 때는 버렁이가 많았어. 거지가. 여자애하고 남자애 쪼끄만 것들이 빌어먹고 다니드래. 거지로. 너무 불쌍해서 할아버지가 자식도 읎고, 우리 아버지는 그 때 생기지 않았응께. 쟤들을 키워서 내 자식같이 삼는다고 고아를 데려다 키웠어. 키웠는데 남자애가 얼매나 영리하고 똑똑헌지 이름이 기렁이. 그러는 중에 우리 아버지가 생겨났단 말이여. 근디 기렁이가 너무 똑똑해. 공부 가르키니 이 눔이 나중에 이십대 쯤 돼서 둘이 결혼을 시켰어. 첫 애 낳고서 지가 좀 나가본다고 나가서 일본으로 뛰어 들어간겨. 일본서 항해사가 됐어. 군함 부리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마도로스지. 그래 갔구서 한 2년인가 있다가 마누라 오라고 해서 애기 델고 갔어.

우리 아버지는 열여덟 살에 나 낳았슈. 우리 어머니는 열여섯 살 먹고. 할아버지가 노인네니까 얼른 장가 들인다구 열다섯 살 먹어 결혼시켰는디 금방은 안 낳아지구. 내가 아슬아슬하게 생각나는디 우리 할아버지가 내 돌 때 돌아가셨대. 일본으로 간 그 애 보고 싶다고 그랬대. 해방이 됐는데 그 며느리 자리가 왔드래. 우리는 그 때 홍동으로 이사 왔어. 우리 외갓집이 홍동 대령리야. 우리 고모는 그냥 덕산에 계신데 옷이 일본 하까마 입고 일본식으로 머리 하고 왔는데 정이 떨어지더랴. 왜냐면 일본 사람 다 쫓겨나갔는디 그런 의복 입고 챙피하고 싫더랴. 그래서 우리 집 일러달라 하는데 안 일러줬댜. 우리 고모가 수란리 찾아올까 싶어서. 일본 사람들 여기 사람들이 웬수 같이 알았는데 좋아하겄슈? 그러구 간 뒤로 소식이 읎어유. 그런디 그 때 아들만 넷을 낳아서 다섯 이랴. 왜 이렇게 소식이 읎었냐구 그러니께 대동아 전쟁 허느라구, 배를 만날 부리니까 정신이 읎었댜. 군인 3~5000명 싣고 태평양 가다가 폭탄 맞아 죽었댜.   

가 나이 먹고 나 어린 시절 댕겼던 디가 자꾸 생각나고 보고 싶드라구요. 그래서 한 오년 전에 둘째 사위가 나더러 어디 구경시키구 싶은데 어디가 가고 싶어유 묻더라구요. 나는 다른 데는 갈 데가 읎고 어린 시절 아버지하고 있던 그쪽에 한 번 가봤으면 좋겠다. 으름재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 가서 느낀 거 쓴 거 있어. 나는 고향 떠나 어린 시절 살든/가야산 자락에 첩첩산중/으름재 마을을 무럼무럼/찾아갔네 지금도 비포장 도로/큰 산이 평풍처럼 둘러 싸은/아름다운 산/옛적 독립투사 피신처라 할 수 있네/내가 어린 친구들하고 놀든 마당가에/백 년이 된 살구나무는 지금도/싱싱한 잎을 만발하고/정자가 되어 모든 사람들에게/시원한 바람을 주는데 우리 인간이 된/이내 몸은 고목처럼 되어 생명을 주지/하늘나라 내 고향 찾아가리.

리 할머니가 나를 땅에다 놓질 않구 맨날 안아주고 귀여워했어. 요새 늙으니까 할머니 생각이 더 나대? 그래서 그림으로 그렸어. 핵교 다닐 때 이후에 처음 그려 본거야. 그럴 듯 허쥬? 우리 막내딸이 의사인데 시 잘 써. 작년부터 써서 보내는데 읽고 싶을 때 읽어보고 그래. 88세 엄마/임세경 시/생일 촛대를 모두 다 꽂기엔/너무 많은/우리 엄마는 88세/그간의 노고를 말해주나/휘어진 허리는 바닥을 향해있고/검게 탄 피부는 한없이 거친 것이/세찬 비바람 견뎌낸 고산지대 노송 같다/매일같이/바름벽의 사진들을 바라보는 건/천국으로 가는 날/모든 추억을 안고 가려함인가/아직도 피어나지 못한 꿈이 많건만/한숨대신 잔잔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건/평생을 사모한 하나님 얼굴 뵐 날이/멀리 있지 않음 까닭이겠지/그간의 한숨과 슬픔과 기쁨들을/한권의 시로 책속에 담아 놓은 채/오늘도 88세 엄마는/바름벽의 사진들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88세 엄마의 생신을 축하하며)

오십 넘어서부터 시도 쓰고 글도 쓴 거야. 내가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하고, 꽃을 좋아하고, 자연을 참 사랑해유. 곤충 한 마리라도 죽는 게 싫어서 살며시 놔 줬슈. 그래서 지금도 고기를 안 먹어. 내가 보고 느낀 걸 쓰는 거, 그게 시여.

아주 작디 작은 몸, 그 어디에서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의 삶에서 느끼고,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시(詩)가 되고 그림이 됩니다. 달력 종이 뒤에 작게 떨리는 손으로 그려낸 그림은 돌아가고 싶은 어린 시절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이 그린 그림 옆에 다시 시 하나를 적어갑니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당신이 있어 고맙습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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