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과 3·1독립만세운동… 임시정부 수립 계기
상태바
만해 한용운과 3·1독립만세운동… 임시정부 수립 계기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4.15 09: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1운동 100주년, 만해 열반 75주년 기획<2>
1919년 3월 1일 하오2시 독립선언식을 위해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3·1 기록화 자료사진)

3·1독립운동, 대한민국의 건립으로 구현된 민주공화정운동
3·1독립만세운동은 우리민족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거
남녀노소, 신분의 귀천이 없이 국민이 함께했던 국민운동
1918년 12월 윌슨 민족자결주의 제창, 만해 한용운 자극해


3·1독립운동의 역사적 의의로 새롭게 부각되는 것은 3·1독립운동이 대한민국의 건립으로 구현된 민주공화정운동이었기 때문이다. 3·1독립운동은 민주공화정의 토대 위에 대한민국을 건립토록 했던 계기가 됐다. 이는 3·1독립운동이 ‘3·1혁명’으로 불려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민주공화정운동은 3·1독립운동으로 확연히 드러났다. 3·1독립운동 이전의 국권회복운동은 왕조를 회복하자는 일종의 복벽(復辟)운동이었다. 복벽적 독립운동의 목표는 국왕과 양반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일종의 전근대적인 봉건사회로 회귀하는 것이었고, 대한제국의 회복을 의미했다. 그러나 3·1독립운동을 통해 독립운동가들이 세우고자 한 국가는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였던 것이다. 법정에서 재판관이 ‘당신들이 세우려고 하는 나라가 어떤 나라냐’고 물었을 때, 민족대표들은 구왕조의 회복이 아니라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라고 했다. 이 이념에 따라 건립된 것이 대한민국이고, 이를 운영하기 위한 정부가 임시정부였다. 한성정부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 정부, 그리고 상해의 임시정부는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로 나타난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정부를 건립하자는 운동은 우리 역사에 있어 유례가 없었던 혁명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 한용운 3·1운동 불교계 민족대표 참여
우선 3·1독립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후 강대국에 의해 재편되고 있던 새로운 제국주의적 세계질서에 도전한 최초의 저항운동이라는 점에서 세계사적인 의의가 뚜렷하다. 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서는 전승 연합국이 패전국에 대한 전책(戰責)을 과중하게 부과시켰다. 또 패전국 식민지에 대한 처리방안도 전승 강대국에 유리하도록 조정되고 있었다. 이것이 말하자면 1차 세계대전 이후에 형성된 새로운 세계질서인 베르사이유체제였던 것이다. 그 체제는 3·1독립선언서에서 염원하고 있던 ‘폭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는’ 것도 아니고, 제국주의의 강권침략 시대가 새로운 형태로 여전히 온존, 고수되는 신체제였기 때문이다. 식민지 강대국이 피식민지 민중의 전쟁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전쟁 기간 중에 약속한 약소국가, 약소민족의 자주독립을 실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오히려 식민지 수탈체제를 강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윌슨 대통령이 선언한 민족자결원칙도 영국, 프랑스 등의 반대로 패전국 이외의 식민지, 특히 유럽의 백인지역 이외에서는 적용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말은 민족자결원칙이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있는, 전승국의 식민지나 전승국의 지배아래 있는 약소민족에 대해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도 전승국 일본의 강점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민족자결원칙이 적용될 수 없었다. 이렇듯 3·1독립운동은 바로 이 같은 세계질서의 재편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던 강권·침략주의에 도전하는 세계사적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3·1독립운동이 태동하는 데에는 몇 가지 흐름이 있었다. 그것은 각 종교단체의 독립운동 시도와 관련이 있었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그룹으로 천도교와 개신교 측을 들 수 있는데,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국제사회의 움직임을 간파한 두 종교계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독립만세운동을 구체화했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계와의 연대는 만해 한용운을 통해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할 일이다. 당시 만해 한용운이 서울 계동에서 발행하던 ‘유심’지의 필자 중에는 최린·최남선·유근·이광종·현상윤 등 한학자를 비롯한 민족운동가와 승려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유심’ 3호를 간행할 즈음인 1918년 12월초에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돼 만해 한용운을 자극했다. 이 무렵 한용운과 최린이 은밀히 만나는 것을 계기로 불교계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한용운은 3·1독립운동 계획 당시 임제종 설립운동의 주축세력을 불교계의 민족대표로 참여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사찰들이 깊은 산 속에 위치하고 있어서 당시 서울에 올라와 있던 백용성 한 사람만 민족대표로 참여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 두 사람에게 영향을 받은 중앙학림에 재학하고 있던 청년승려들이 독립선언서 배포에 널리 힘쓰게 됐던 것이다. 1919년 3월 1일 낮 12시 경부터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이 서울 종로의 태화관에 모이기 시작해 오후 2시까지 길선주·유여대·정춘수·김병조 4명을 제외한 29명이 참석, 이종일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어서 최린이 경무총감부에 전화로 독립선언을 통고했다. 대표 29명은 손병희를 필두로 다섯 대의 자동차에 분승, 일경에 연행됐다. 불참한 네 사람 중 세 사람은 그날 늦게 도착했고, 김병조는 상해로 탈출했다고 한다. 그 시각 파고다공원에서 민족대표를 기다리고 있던 학생대표 10여명이 태화관에 몰려와 대표들의 파고다공원 합류를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손병희의 반대로 대표들이 움직이지 않게 되자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가행진에 나서게 됐던 것이다.
 

■ 예산 독립만세운동 충남지역 최초로 기록
이렇게 3월 1일 당일 만세운동을 일으킨 곳은 서울을 포함한 8~9곳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확인된 곳은 서울을 비롯해 평양, 진남포, 정주,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이었다. 첫날 만세운동에 이어 그 이튿날에는 함흥, 해주, 수안, 황주, 중화, 강서, 대동 등지에서 일어났고, 사흘 째 되는 3월 3일에는 고종의 인산일임에도 불구하고 충남 예산을 비롯해 개성, 사리원, 수안, 송림, 곡산, 통천 등지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충남 예산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충남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렇게 전국에서의 만세시위운동은 4월말까지 집중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4월 이후 만세운동이 퇴조하게 된 데는 일본 군경의 가혹한 탄압 이외에도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문제를 논의하지 않기로 했다는 보도가 운동의 추동력을 고갈시켰기 때문이다. 이후 만세시위운동 대신 대중조직운동과 무장투쟁이 나타나게 된 것은 민중들이 가졌던 뜨거운 독립열망 때문이었다. 4월 1일 67회나 일어나 정점을 이뤘던 만세운동은 4월 11일까지 매일 10회 이상 일어났다. 50회 이상 일어난 날만 3일(3월 27일, 4월 2일, 4월 3일)이 있었고, 30회 이상 일어난 날도 15일이나 됐던 것으로 알려지기 때문이다. 시위참가자도 서울에서 수십만 명을 비롯해 의주 3만 명, 강화 2만 명, 합천 1만 명, 삭주군 8000명, 선천읍 6000명이나 됐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시위는 총 2000회(일제 측 1524)가 넘었고, 연인원도 202만 명을 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통계는 50명 이상 모인 곳만 통계를 잡은 일제 경찰의 통계에 의한 것이지만, 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후 1년 동안 10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증언에도 주목할 일이다.

결과적으로 1919년 3월 1일 정오를 기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던 3·1독립만세운동은 우리민족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거요, 우리 국민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사상의 발현이며, 우리민족의 자유발전을 위한 국민들의 단합된 의사표현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3·1독립만세운동은 독립선언서에서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했고(我朝鮮의 獨立國임과) 우리 국민이 자주민임을 선언해(朝鮮人의 自主民임을) 우리의 자주성과 독창성을 주장했다. 인류평등의 사상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함) 세계평화와 인류공존 공영을 주창(人類共榮共存權을 主唱)했던 운동의 주체가 남녀노소 신분의 귀천 구분 없이 모든 국민이 함께 했던 국민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세계사에서도 찾기 힘든 운동이었던 것이다. 3·1독립만세운동의 결과로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돼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나라의 체제를 민주공화제로 정했던 것이다. 이 운동은 우리 국민들에게 자존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면서 이후 독립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농민운동과 여성운동 등 제반 사회운동의 기초가 됐던 것이다. 이러한 3·1독립만세운동을 촉발시킨 중심에 홍주출신의 만해 한용운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 후세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