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백제역사 간직한 부여 부소산 소나무 숲 향기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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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백제역사 간직한 부여 부소산 소나무 숲 향기 가득
  • 취재=한기원 기자 사진·자료=한지윤 기자·신우택 인턴기자
  • 승인 2019.07.17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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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시대 공동체의 삶과 생명의 공간이다
부여 부소산에는 토종 소나무 숲으로 빼곡하다.

소나무를 뜻하는 ‘풋소’ 한자로 표기한 ‘부소’에서 유래 결국 ‘솔뫼’
부소산, 토종 소나무 비롯해 왕벚나무, 갈참나무 우거진 울창한 숲
“토종 소나무 숲은 우리에게 건강은 물론 많은 것들을 주는 보물”
아름드리 소나무 숲은 미세먼지시대 우리들에게 도움이 되는 나무


부여의 부소산은 부여읍의 북쪽에 위치하며 금강과 연접해 있는 높이 106m의 낮은 산이다. 백제 때 성왕이 도읍을 웅진에서 이곳 사비로 천도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부여의 진산이며 동쪽 작은 봉에 비스듬히 올라간 곳을 ‘영월대’라 부르고, 서쪽을 ‘송월대’라 이른다” 했다. 언제부터 부소산으로 불렸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소나무를 뜻하는 ‘풋소’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부소’라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결국 ‘솔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부여군의 세계유산인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을 품고 있는 부소산에는 토종 소나무의 숲 향기로 가득하다.

부소산은 백제왕실의 후원이자, 사비백제 최후의 보루였던 부소산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돼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부소산은 660년 백제 멸망의 안타까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명산으로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떨어져 절개를 지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낙화암과 고란초에서 나오는 약수를 마시면 젊어진다는 전설이 있는 천년 고찰 고란사가 있다. 또 반월루 광장에서 동북쪽 태자들이 거닐었다던 부소산의 진수를 볼 수 있는 태자골을 지나 백제여인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궁녀사, 백제왕과 귀족들이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국정을 계획하고 백성들의 평안을 기원했던 영일루, 백제 삼충신의 숭고한 넋을 기리는 사당 삼충사를 만날 수 있다.

이곳 부소산에는 토종 소나무를 비롯해 왕벚나무, 갈참나무, 상수리나무, 단풍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 사이로 마을 뒷산을 산책하듯 편안하게 오를 수 있는 부소산은 비교적 완만한 산세를 가지고 있다. 봄에는 벚꽃, 진달래, 철쭉이 흐드러지고 여름에는 짙은 산림욕을 할 수 있으며 가을에는 예쁜 꽃단풍이 매혹적인 산이며 겨울엔 설경이 아름다운 계절마다 갖가지 매력이 담겨져 있는 산이라는 설명이다.

■ 소나무와 참나무가 뒤섞인 숲길

부여 부소산에는 토종 소나무 숲으로 빼곡하다.

백제시대, 부여는 사비로 불렸다. 부여가 백제인들의 숨결을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 된 것은 성왕이 도읍지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면서다. 사비 천도가 이뤄진 성왕 16년~백제멸망까지를 ‘사비시대(538~660)’라고 하는데, 이 사비시대에 부소산은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여하간 이런 역사적인 사건 때문인지 성왕은 조각상까지 세워 기릴 정도로 부여 사람들에게는 비중이 매우 높은 역사인물이다. 백제시대 사비의 유적지로는 동헌·객사·내아 등 조선시대 관아건물(1869년 신축)이 있다. 부여군청의 관광해설사는 “객사 등 관아건물의 주춧돌·기단석은 대부분 백제 때 만들어진 석재를 활용하고 있다”며 “탑신·옥개석 등 탑돌도 볼 수 있다”고 했다. 관북리 유적 건너편, 부소산성 옛 정문 쪽에선 지금도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백제시대 절 천왕사 터인데, 사리를 넣던 사리공이 뚫린 심초석과 금속제 귀면상 등을 여기서 발굴했다고 한다. 천왕사 터 위 산자락엔 또 다른 백제 때 절 서복사 터도 있다.
널찍하게 벽돌을 깐 숲길을 지나면 삼충사가 나타난다. 백제의 세 충신으로 꼽는 성충·흥수·계백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삼충사 터에 일제강점기의 씁쓸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위해 드나들던 통로로, 일본인들은 차량으로 큰길을 이용하고, 주민들은 이 통로를 통해 신사참배를 했다고 전해진다.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는 삼충사 터에 일본 왕이 직접 참배하는, 무려 6만5000여 평에 이르는 ‘부여신궁’을 지을 계획이었다고 한다. 부여에 도쿄 신궁과 맞먹는 1급 신궁을 지어 ‘황민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공사를 위해 부여읍내의 유적들이 파헤쳐지고, 일본인과 친일파들의 땅 투기가 극성을 부려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패망으로 공사는 중단됐고, 광복 이후에는 주민들이 신궁의 공사장을 파괴했다고 한다. 그 터에 1957년 삼충사를 지었다. 삼충사 뒤쪽은 옛 백제토성의 남문 자리다. 단풍나무 울창한 숲길을 걸어 제2남문터(부여여고 뒷산)를 지나 영일루로 오르면 계룡산 쪽에서 뜨는 해를 맞이했다는 영일대 터가 나타난다. 부여 홍산현에 있던 관아 문루를 1964년 이곳에 옮겨 영일루라는 현판을 걸었다고 한다. 안쪽에 걸린 ‘인빈출일’ 현판은 ‘삼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해를 맞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옛 토성의 흔적들을 넘나드는 숲길은 소나무와 참나무가 뒤섞인 청설모·다람쥐 등의 놀이터다. 신발 밑창에 깔았다는 신갈나무도, 시루떡 할 때 깔았다는 떡갈나무도 이제는 은은한 풀벌레 소리를 거느렸다. 영일루부터는 흙길이 이어지다가 널찍한 평지에 소나무가 숲을 이룬 ‘군창지’에 이르게 되는데,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사용된 창고 터가 확인된 곳이다. 여기에 전해오는 이야기 한 토막은 “일제강점기 발굴 당시 이곳은 백제 때 창고 터로 알려졌는데, 여기서 탄화된 쌀이 대량으로 발견됐다”고 한다. 당시 부여고적보존회의 가장 큰 고민이 “창고 터에서 출토되는 쌀을 부여를 찾는 고급관리나 저명인사에게 기념으로 선물하는 일”이었다는 것.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도 앞 다퉈 ‘백제 쌀’을 찾으면서, 기념품 가게엔 가짜 백제 쌀이 등장해 팔려나가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창고 터의 쌀은 뒤에 조선시대 것으로 확인됐다.


■ 부소산의 빼어난 아름드리 소나무 숲

기세등등한 아름드리 토종 소나무.

“숲은 우리에게 건강은 물론 많은 것들을 주는 보물인데, 이 보물을 모르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소산의 아름드리 빼어난 소나무 숲 등은 숲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건강을 지켜주는 의사죠. 이곳에는 역사 유적도 많아 역사 공부에도 좋은 곳입니다. 그동안 참 많은 숲에 가봤는데 이곳 부소산의 숲처럼 마음 편히 걸을 수 있는 숲은 아직 만나지 못했지요. 이처럼 햇빛이 거의 들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더운 날에도 더운 줄 모르고 걸을 수 있어서 좋지요. 무엇보다 우리 토종 소나무들이 많아서 좋은데, 소나무가 우리 몸에 좋다는 것은 익히 잘 아시는 사실이죠?” 부소산의 숲을 안내해 주는 일흔이 넘은 숲 해설가의 설명이다. 정말로 부소산의 숲속을 걷다 보니 우리의 토종 소나무들이 기세등등했다.

족히 100여년은 자랐을 소나무 둥치가 얼마 자라지 않은 것처럼 가늘게 보일 정도로 키가 큰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죽죽 빼어난 듯 서 있었다. 해설가의 설명에 따르면 소나무는 특유의 성분을 내뿜어 다른 식물들이 주변에 자라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어떤 식물보다 햇빛을 좋아하는데, 주변에 다른 식물이 자라 자신보다 커지면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참나무는 소나무 주변에 숨죽여 자라며 키를 최대한 키운다는 것. 그러다가 소나무보다 높게 자랐다 싶으면 키 크는 것보다 가지를 벌리는 데 열중한다고 한다. 참나무는 소나무보다 빨리 자라는데다가 어지간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소산성의 숲에는 우리 토종 소나무들이 기세등등할 수 있는 것은 지나치게 큰 참나무들의 가지를 어느 정도 가지치기해 줌으로써 소나무와 참나무가 함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부소산의 빼어난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미세먼지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여러 가지 도움이 되는 나무로 다가오고 있다.

부여 부소산에는 토종 소나무 숲으로 빼곡하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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