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비토벌작전… 그리고 국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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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토벌작전… 그리고 국지전
  • 황규창<전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홍성군지회장>
  • 승인 2010.07.02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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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창의 내가 겪은 6.25 ③

<황규창 약력> △1929년 구항면 공리 출생, 1943년 갈산초등학교 졸업, 1949년 군 입대(보병 제9연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기습 남침으로 1연대에 편입 전투 참가, 10월 18일 함경도 원산지구 전투에서 부상, 10월 30일 부산3육군 병원 후송 입원 △1951년 2월 20일 태백산 일대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해 완전 소탕 후 북진, 4월 30일 38선 최전방(금화지구) 배치, 1951년 6월 천불산전투. 734(모택동고지), 633(김일성고지), 424(무명고지) 전투 △1953년 7월 27일 휴전까지 저격능선전투ㆍ오송산전투ㆍ백마고지전투ㆍ방송고지전투ㆍ화살촉고지전투 등 수많은 전투 참가 △1956년 4월 18일 보병30사단 91연대에서 특무상사로 명예 전역 △1974년~1982년 마을이장 및 면정화위원 역임 △2007년~2008년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홍성군지회장 역임 

 

 

 

 

 


우리 부대가 도주하는 중공군을 추격하면서 청평댐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을 때, 그때가 51년 5월 초순으로 생각된다. 날씨는 화창한데 안개가 끼어 시야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 어느 산골에 민가 7~8호가 있는 지점을 수색하던 중 적의 기습 사격을 받고, 즉시 응사 후 마을을 완전 포위했다. 살고 싶으면 투항하라고 권고하였으나, 계속 반항하면서 도주할 기세를 보이자 아군의 집중 사격으로 중공군 7~8명을 사살하였고, 이 교전에서 아군 1명이 전사하였다.

우리 부대는 퇴각하는 중공군의 기습 공격을 받으며 51년 5월 중순경 청평댐 측면에 있는 국망봉 1000고지로 넘어 청평댐 수문 앞 까지 이동하여 추격을 위한 도하작전을 준비하였다. 수로의 폭은 약5~600m정도였으며 건너편에서 중공군의 사격이 계속되고 있었다. 당일 오후 4시경 도하 명령을 받고 물속에 들어가니, 앞에서는 중공군의 사격이 계속되고 뒤에서는 빨리 도하하라는 추상같은 명령이 계속 되는 진퇴양난이었다. 마침 가평으로 진격하는 미군의 지원 사격으로 우리 부대는 무사히 도하작전을 성공하여 중공군 7명을 생포하고, 도망가는 적을 계속 추격해 미처 도주하지 못한 중공군 10~15명이 투항했다. 중공군은 "이승만 군대 띵호와"라고 외치며 "배고프니 밥 좀 달라"고 말했다. 우리 부대는 경기도 포천방면으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작전 명령에 따라 적을 추격하며 이동했다. 강원도 사창리 방향으로 20km의 험난한 산(일명 도마지고개)을 넘어 목적지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낙오병들과 보급이 제대로 지원이 되지 않았다. 하루1끼의 주먹밥으로 버티면서 오직 상부의 명령에 따라 도망가는 중공군을 시간을 주지 않고 추격하여 금화읍이 보이는 계곡으로 진입하였다. 이때 아군 항공기가 우리를 적군으로 오인하고 공습을 시작했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대공포판을 펼쳐 아군임을 알린 후 계곡 안쪽으로 계속 진격 하던 중 양쪽 능선에서 우리에게 집중 사격이 시작되었다. 너무 성급히 진격하여 중공군의 주둔지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이때 지휘관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정면으로 돌파하라. 머물 거리면 다 죽는다. 참으로 짧고도 긴 시간이었다. 퇴각하던 중공군의 사기가 떨어졌고 우리군의 과감한 공격에 혼비백산 도주하여 한명의 희생자 없이 고지를 점령하였다. 고지에는 놈들이 큰 가마솥에 밥과 국을 끓이고 있었다. 우리는 놈들이 해 놓는 밥과 국을 실컷 먹고 다시 추격전이 계속 되었다. 그날 밤 10시가 넘어서 금화읍 외곽에 도착진지를 구축하고 다음날 10시쯤 비행기로 보급을 받은 후, 추격전을 위한 부대 정비 및 재편성을 완료 후 명령을 기다렸다. 후퇴를 계속하던 적군도 38선을 경계로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었던지 발악적으로 공격을 하면서 국지전 형태로 피아간의 유리한 지형을 탈취하고 자 애를 썼다. 우리 부대는 금화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천불산을 탈취하고자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중공군의 인해 전술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하여 사단장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은 후 손실된 병력을 보충 받아 약1주간 주야로 맹훈련을 통하여 전투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며칠 후 재차 공격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때가 1951년 6월경으로 내가 총칼을 메고 전쟁터를 헤매 인지 어느덧 1년이 지나고 있었으나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새벽5시경 공격을 감행하여 10시경에 천불산 약8부 능선까지 진격하니 적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수류탄 및 총탄을 아군에게 퍼부었다. 아군도 지난번의 실패를 경험으로 과감하게 육박전을 감행하여 천불산 400고지를 탈환하였다. 이 전투에서 우리 소대원 5~6명이 전사하였다. 고지점령과 동시 재편성하여 진지를 구축 약1주간 방어하다가 동년 7월 초순 금화 평야가 눈앞에 보이는 무명고지로 이동하며 방어전에 임하던 중 국방부에서 정전 회담중이니 더 이상 진격을 하지 말라는 회보가 전달됐다.

 

 

 

 

 

 

 


국지전

이때부터 피아간의 신경전과 한 치의 땅이라도 점령하고 유리한 지형을 탈취하려는 소규모 국지전이 시작되었다. 야간 수색 정찰을 통하여 적의 동태를 살피거나 기습으로 적을 사살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전과를 올리는 등 적군도 수시로 아군 진지에 수류탄 공격을 감행하여 피해를 주는 등 특히 중공군의 인해 전술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매일 밤 10~11시경 은은한 퉁소소리로 아군병사의 심리를 혼란케 한 후 꽹과리와 징을 치면서 공격을 감행하여 아군에게 피해를 주고 후퇴하는 전술을 반복하였다. 우리 부대는 작전 명령에 따라 31연대와 교대하고 접근산 능선 동북간 계곡 모택동고지(734고지)를 점령하고 방어중 51년 8월 말경 적 중공군의 연대규모 병력으로 우리부대 방어진지를 포위 공격하여 왔다. 두려움 없이 불굴의 투지로 방어하여 고지를 사수하고 퇴각하는 적을 반격하여 734고지를 재탈환하여 진지를 구축하고자 땅을 파보니 얼마나 포탄을 퍼부었는지 흙이 아니라 먼지와 핏물로 범벅이 되었고 시체 썩은 냄새로 견디기가 어려웠다.
후일 734고지는 포탄으로 2미터가 낮아져 732고지라 하였으며 당시 시체의 뼈 때문에 진지구축에 어려움이 많았다. 얼마 후 우리부대는 17연대와 진지를 교대 후 새로운 공격을 위해 후방으로 이동 2~3일간의 휴식과 전투 준비를 한 다음 51년 10월초순경 734(모택동)고지전방 1km지점에 있는 633(김일성)고지 공격을 위해 새벽3시에 조식을 완료하고 집결지에서 공격개시 지점에 04:30분까지 도착하라는 명령을 하달 받았다. 소대별로 공격 대기지점을 출발한 후 오전 8시경 먼저 출발한 소대원이 중공군 포로1명을 이송하는 것을 보고 전방상황을 물어보았다. 적의 화력과 장애물로 인하여 5부 능선도 진격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앙공격 임무를 맡은 우리소대와 좌, 우측 소대도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을 중대장에게 보고 후 적의 장애물과 토치카의 위치를 파악후 정면으로 공격할 결심으로 1분대장을 대동하고 적의 토치카를 파괴하기 위해 M1소총에 유탄 발사기를 장착하였다. 적 토치카의 거리는 약 6~70m 정도였다. 각도를 조정 후 3~4발을 명중시켰다. 이때 고지에서 우리에게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우리도 적극 응사를 하면서 2․3분대장에게 내가 토치카를 파괴 할 테니 계속 지원사격을 하되 도치카쪽으로는 사격을 하지 말도록 명령 후 칼빈소총을 등에 메고 수류탄 2발의 안전핀을 빼서 양손에 들고 또 2발은 허리에 차고 토치카 옆 5m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그때까지 도치카 안에서 눈치를 못 챘는지 고지 아래로 자동 소총사격만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수류탄 2발을 토치카 호안으로 던져 넣었다. 토치카가 파괴되자 아군은 일제히 공격하여 장애물을 제거하고 과감하게 633(김일성) 고지를 공격하여 오후17시경에 기어코 고지를 탈환하였다. 기쁨도 잠시 우리 소대원 20여명 뿐 2ㆍ3소대는 통신이 두절되어 알 수 없고 사방에서 적군의 함성소리에 당황하고 있던 차 철수명령이 하달 되어 2ㆍ3분대장에게 신속히 공격 대기지점까지 대원을 인솔하도록 하고 나는 1분 대원과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면서 목적지까지 철수하였다.

우리소대가 무사히 철수한 후 명령에 의거 집결장소로 이동하여 보니 우리 중대 4개 소대가 집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대장이 부상으로 후송되었고 부상자 10여명이 피투성이로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등 지휘관이 없는 혼란한 상태였다. 나는 병사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현재 위치는 적으로부터 사정거리나 고립 될 수 있음으로 신속히 어젯밤 집결지까지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부상병은 교대로 업고 보급품, 배낭, 소총은 부상당하지 않는 병사가 메고 집결지까지 도착한 시간은 밤11시였다. 잠시 저녁 식사 후 전날 전투에서 우리군의 전사자 40여명이고 전과는 중공군 포로1명과 토치카 파괴, 사살5~6명이였다. 말 할 수 없는 패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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