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서산 정암사는 흡사 머리위에 산새둥지처럼 올라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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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산 정암사는 흡사 머리위에 산새둥지처럼 올라 앉았다
  •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 홍성고 20회)
  • 승인 2010.11.19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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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꾼 유태헌의 전국 100대 명산 산행기 오서산

홍주신문은 국토의 등뼈를 밟아가는 산꾼 유태헌(홍주신문 서울총괄본부장홍동출신홍성고 20회손전화 010-3764-3344)의 백두대간 종주기를 연재하고 있다. 이와 함께 산림청에서 선정한 전국의 100대 명산 산행기도 연재하기로 했다. 홍주신문 독자들과 산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편집자 주>

산행일자 : 2010년 11월 13일
구 간 : 명대주차장-명대계곡-오서산정상(보령시)-억새능선-오서정-오서산정상(홍성군)-정암사-상담주차장
산행시간 : 3시간 30분 소요

 

 

오서산

 

 

 

오서산 정암사

 

 


오서산(烏棲山)은 보령시 청라면과청소면, 홍성군 광천읍과 장곡면, 청양군 화성면 경계에 있는 산이다. 해발 791m 인 오서산은 '평지 돌출형 산'으로서 금북정맥의 최고봉이며, 위용과 기상이 빼어나고 신령스런 기운을 지닌 호서 제일의 명산이다. <삼국사기 전 32>에 오서악 이라고 기록 되어 있고, 당시에는 명산대천을 대사, 중사, 소사로 나누어 국가 차원의 천재를 올렸다고 한다. 백제 때는 오산으로 불리며 대사 격에 해당 되었고 통일신라에서는 중사의 위치에 있었으며, 이후 백제 부흥운동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또한 중국지리서인 훈원의 백제전에는 신령스런 산으로 오산과 계룡산을 소개하고 있으며, 정암사 중수기에는 금강산, 구월산, 묘향산에 버금가는 호서지방 최고의 명산으로 수록 기운이 크게 맞닿아 우뚝 서 여유 있게 솟아 있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오산 또는 오서산으로 불리며 민족의 영산으로서 태양 숭배사상과 산악신앙의 중심이 되어 왔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오서산으로 바뀌었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까마귀산'으로 비하되면서 영산의 의미는 완전히 퇴색되었다. 오서산이 단군 조선에서 부터 백제로 이어지는 동안 신령스런 기운이 넘치는 산으로 받들어진 것은 풍수 지리적으로는 물론 그 정기와 위용이 "태양안에 있는 세발달린 까마귀의 삼족오가 살고 신의 사자로서 천상과 인간세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우리민족의 태양숭배사상을 담기에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오서산은 영산으로서 민족의 정기를 이어오고 있으나, 후손들의 무관심으로 '까마귀산'으로 잘못 알려 졌다. 늦게나마 광천농협과 정암사, 뜻있는 지역민들이 힘을 모아 '오서산 정기 회복운동'에 나서고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재경홍성고등학교산악회가 중심이 되어 인천, 대전, 홍성지역을 비롯해 전국 연합으로 오서산 산행을 하기로 했다. 07시30분에 사당역에서 만나 준비를 마치고 07시50분경 6대의 버스가 서해안고속도로 따라 달린다. 추수가 끝난 들녘에는 소에 먹이가 되는 볏단을 하얀 비닐로 진공포장상태로 수북이 쌓아 놓았다. 옛날 예산군 대흥면의 '의좋은 형제'에 나오는 볏단은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우며, 어려서 볏단에 숨어 숨바꼭질 하던 시절 또한 그리워진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고속도로 정체는 이어지고, 예상보다 한 시간 늦은 11시경 명대계곡주차장에 도착하여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산행 길에 오른다. 서해를 오가는 뱃사람들마저 이산을 등대삼아 항해 했을 정도이며, 또한 서, 남, 북 삼면이 모두 깎아지른데 반하여 남동쪽 보령 청라만이 조금 느슨하다. 가파른 능선 길을 50여분 치고 오르면 보령시에서 세운 오서산 정상석이 서 있는 정상에 도착한다. 정상에 서면 동서남북 사방이 일망무제로 트였다.

서쪽으로는 눈앞에 안면도, 그 끝에 원산도가 그림처럼 나앉았고, 남으로는 성주산, 성태산. 장군봉이 가지런하다. 북으로는 울렁거리는 금북정맥 줄기 쪽으로 홍성시내와 백월산, 용봉산, 덕숭산, 가야산이 가물거리는 한편 가까이에는 의좋은 형제가 살았던 예당저수지가 보이고 왼편으로 임존성이 놓인 봉수산도 선명하게 눈에 든다. 동으로는 끝없이 타고 내리는 긴 칠갑산 줄기며, 차령산, 광덕산, 흑성산 등 북쪽의 금북정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금북정맥의 정기 탓인지, 기골이 만만치 않은 인물을 숱하게 배출했다. 고려 공민왕이 이 고장을 목(牧)으로 승격시킨 것도 여기가 보우국사 고향이기 때문이며, 또한 최영 장군을 비롯해 조선초기의 성승, 성삼문, 성웅 이순신, 추사 김정희, 한말의 만해 한용운 선사, 백야 김좌진, 유관순 열사, 매헌 윤봉길 의사. 고암 이응노 화백 등 모두가 민족사를 이끌었던 훌륭한 지도자들이 어느 고장 보다 많다. 또한 이곳은 청양군과의 경계를 이루며 동북으로 뻗어 내린 이산줄기 끝에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항쟁지인 임존성(任存城)과 주류성(周留城)이 들어앉았다. 발치아래 공덕공고개에서 부터 344.9m봉 너머 기러기 재, 그 너머 독재로 건너서는 262m봉에서 왼쪽으로 숫고개와 오른쪽으로는 산성리 협곡과의 어간에 주류성이 있었다(홍성군지)고 주장한다. 또한 홍성군지에서 향토 사학자 박성흥 씨는 지리적으로 내다볼 때, 백마강을 건너자 이내 마주치는 청양군 정산면의 두율윤성을 전초기지로 삼고, 그보다 후방인 칠갑산의 두율성을 중간보로 하여, 여기 홍성군 장곡면의 산성리와 대현리의 대부동문지를 중심으로 하는 얼방산 석상과 그 건너편 학성산성에서 끝까지 항쟁했으니 그곳이 곧 주류성이라는 것이다. 또한 박성흥 씨는 얼방산의 그 '얼방'을 백제 가요의 후렴인 '얼럴럴상사디야'에 고리를 물어 '얼라하'라 했으니, 거기가 곧 왕궁을 뜻하는 것인즉, 실제로 부흥군이 일본에서 데려온 부여풍(扶餘豊)이 거기를 거성(居城)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산의 동서북면이 석축인 한편, 남쪽이 자연암벽이라 건너편의 학성과 함께 그곳이 주류성 본성이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부소산 사비성을 빠져 나온 달손, 여좌진, 은솔, 복심, 도침, 흑지상지 등이 칠갑산 두류성에 이어 여기 오서산 산자락에 있는 주류성에서 깃발을 세워 부흥군을 일으키자, 10일 만에 3만 군사가 모여 신라 문무왕3년(663)까지 만 3년간 피비린 나는 항쟁을 벌였던 곳이다. 그러나 부흥군의 좌평, 복심이 도침스님을 죽이는 등 내분이 일어나고, 또한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그해 8월 17일 포위 되었다가 한여름 매미소리가 한참인 9월 17일 백기를 내걸었던 것이다.

오서산 정상은 그때 기억을 더듬는 듯, 구름 속에 덮여 있는 주류성을 내려다보고 있지만, 얼방산에 있는 흰 구름은 부흥군의 아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가롭다. 후배들이 준비해온 홍어회 안주와 막걸리 한잔에 목을 축이고 약 2km에 걸쳐 길마처럼, 혹은 황소 잔등처럼 나우리치는 그 긴 둔덕에는 나무 한그루 없이 그대로 억새로만 뒤 덮혀 있지만, 때늦은 늦가을이라 출렁거리는 억새는 보이지 않고 앙상한 억새에 바람만 스친다. 능선을 따라 공사 중인 오서정을 지나 홍성군에서 세운 오서산 정상석을 만난다. 이렇게 오서산은 보령시와 홍성군 양대 시군에서 세운 정상석이 각각 한 개씩 두 개가 세워져 있다. 같은 산인데 지자제 경계가 다르다고 거대한 정상석을 두개씩이나 세워야 하는지, 이것이 우리나라 지자체의 병폐이고 단점이 아닐런지...

내려가는 하산 길엔 군데군데 암릉도 보이고 통천문(通天門)이 아닌 송천문(松天門)을 지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서해안 아름다음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느티나무가 빽빽이 가지를 늘어트린 축대아래서면, 정암사는 흡사 머리위에 산새둥지처럼 올라앉았다. 범종각 다락을 지나 그 뒤에 심검당, 뜨락 위에 극락전, 그 앞으로 요사채, 내려다보면 광천바닥이 발치아래 보인다. 지금 현판에는 '淨巖寺'로 쓰였지만 동국여지승람에는 '正庵寺'로 되어 있다. 본디 백제 성왕3년(527)에 지어진 절로서 신라 헌강왕 때 이웃하는 성주산에 성주사를 크게 일구고 거기 '낭혜화상백월보광지탑비(국보8호)'에 자취를 전하는 그 무염대사가 크게 중수했다지만, 고려고종 25년(1238) 몽고침략 때 불타고 그때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주둔 했다는 것이 자랑이지만, 지금의 절 건물은 20여년 전에 새로 지어진 것이라 한다. 상담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마을길엔 빨간 감이며, 무우, 배추, 당근 등 싱그러운 채소들이 먹음직스럽게 나를 반긴다. 주차장에 내려오니 500 여명의 동문들이 한데 어울려 축제의 장을 이룬 가운데 화합과 친목을 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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