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정월 산신제 용왕제 올리며 문화유산 간직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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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정월 산신제 용왕제 올리며 문화유산 간직한 마을
  • 이은성 기자
  • 승인 2010.11.19 1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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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광천읍 광천리 신대마을

마을회관

광천읍 광천리 신대마을은 광천시장의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신대마을 동네 산이다 하여 이름 붙여진 신동산이 마을을 감싸고 앞으론 광천천이 흘러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태가 갖춰졌다. 예전부터 신대리는 '구장터'라고 불렸으며 예전 광천읍의 장터가 신대리에 걸쳐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으로, 구장터 혹은 구장대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후에 장터가 새로운 자리로 옮기면서 새장터와 새터라고 불리다 한자로 지명을 바꾸면서 새터라는 뜻의 '신대'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됐다.
신대 돌비석


신대리에 들어서면 마을 회관과 더불어 마을앞 청년회가 세운 돌비석이 반기고 있다. 동쪽으로는 소용의 하담마을과 접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신동마을, 남쪽으로 상봉마을, 북쪽으로 신랑동과 접하고 있다. 마을이 읍내와 광천시장과 가깝게 위치하고 있어 마을 주민들은 농사를 짓기 보다는 상업에 종사하거나 광천읍에서 직장생활이 대부분이다.
원주 변씨 열녀문


'남편 살리지 못한 자책으로 같이 세상 떠난 열녀'
 
신대마을에서 오선산으로 향하는 오른쪽 길가에 보면 열녀문이 하나 세워져있다. 이 열녀문의 주인공은 조선시대 수군절도사를 지낸 이유수의 처 원주 변씨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열녀문이다. 남편 이유수가 평안도 지방에서 근무하고 있을 당시 홍경래의 난을 제압해 큰 공을 세웠지만 별다른 보상 없이 남양부사, 창원부사로 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창원부사로 전임된 후 이유수는 군인의 신분으로 오랫동안 전선을 돌아다닌 후유증으로 큰 병을 앓게 되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에 원주변씨는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였지만 안타깝게 남편 이유수는 철종 3년(1851)에 세상을 뜨고 만다. 이에 원주 변씨는 남편을 살리지 못한 것을 자책하여 독약을 마시고 남편과 같은날 하직하게 된다. 이 사실이 조정에 들어가 원주 변씨의 남편을 따른 고귀한 마음을 높이 기려 열녀를 하명하고 함평이씨 문중에서 열녀문을 세워 원주 변씨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마을주민에 따르면 이 열녀문과 관련되어 어떤 근거도 없었으나 최근 함평이씨 문중의 족보가 구해지면서 내용이 확인 되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유수와 원주 변씨는 김삿갓으로 알려진 김병연의 외할버지와 외할머니로 광천 신대마을이 김삿갓의 외가라고 밝혀졌다고 덧붙였다.
1946년 전국 농악 경연대회에서 받은 '용대기'
2000년 마을에서 제작한 '용대기'


'매년 정월 이루어지는 산신제와 용왕제 그리고 용대기'

신대마을 주민들은 매년 정월 초 이튿날 모두 모여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산신제는 신동산에 위치한 산제당에서 지내는데 산신제의 기원과 산제당이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아무도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일제시대부터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70년대까지 미신숭배를 엄격히 금하던 시절에도 산신제를 지내오면 100년 넘게 전통 그대로 산신제는 산제당을 보존해오며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신제당 내부


신대마을 새마을지도자 최정곤 회장은 "현재 산제당은 산길이 험해 어르신들이 제에 참여하기엔 어려운 실정이다"며 "산제당 자체도 노후화가 심각해 유지 보수가 필요한 상태다󰡓고 설명했다. 1998년 한번 보수공사를 마치고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산제당은 기자가 올라가기에도 벅찬 감이 있었으며, 제를 지내기에는 협소한 공간으로 계단과 더불어 정비 사업의 필요함이 느껴졌다. 산제당 내부는 산신령과 함께 있는 호랑이의 그림이 걸려져 있다. 원래는 오래전부터 전해져 오는 그림이 있었으나 도둑이 들어 그림을 훔쳐가는 바람에 현재 흡사하게 다시 제작한 그림이 걸려져 있는 것이라고 한다.

신대마을 정헌국 이장은 "신대마을의 산신제는 지금까지 엄격한 전통이 그대로 유지 되어 오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정 이장은 "산신제를 지내는 날에는 산제당과 더불어 마을 공동우물 '대동샘'에서 용왕제와 마을회관에서 하당제를 함께 지내 총 3개를 순차적으로 지낸다󰡓고 덧붙였다. 특히 산신제가 시작되면서 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용대기'를 사용하는데 이 용대기의 전통도 오래 되었다고 한다. 처음 마을에 용대기가 생기게 된 것은 정확하지 않지만 산신제가 시작되면서 용대기가 있었다는 마을 주민들의 전언대로 용기는 산신제의 역사와 함께 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일 처음 용대기는 현재 소실된 상태며 현재는 1946년 정부수립기념으로 열린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신대마을이 우승하여 받은 용대기가 2000년까지 쓰여오다 현재 너무 낡아 보관중이다. 현재는 마을주민 유승학씨가 새롭게 제작한 용대기가 마을회관에 보관 되고 있으며 최정곤 회장이 현재 1946년 받은 용대기를 마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신대마을 산신제는 다른 마을의 형식과 거의 비슷하지만, 옛날 전통 그대로 금줄을 치는 것은 물론, 황토를 바르고 부정한 일이 생기면 날짜를 미루기도 하는 등 지극 정성을 다하고 있다. 보통 9시부터 시작되는 산신제가 끝나고 나면 산제당 바로 밑에 있는 대동샘에서 불을 지피고 용왕제가 이어진다. 산신제가 마을의 전체 주민의 안녕을 빌며 대사를 비는 제를 주도한다면 용왕제는 주민들의 개인의 소사를 비는 형식으로 이루어 진다고 한다. 새마을 지도자 최정곤 회장은 "대동샘은 상수도가 들어서기 전까지 마을주민들의 공동우물로 쓰여져 왔다󰡓며 󰡒예전부터 절대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고 손수 우물 덮개를 걷어내며 설명했다.
마을 우물 대동샘


실제로 우물은 물이 가득 차 있는 형태로 예전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다만 산제당과 더불어 제를 지내기에 협소한 공간과 마을 우물 주변 울타리등 유지 관리가 역시 필요해 보였다.

이어 용왕제가 끝나면 마지막으로 마을회관으로 주민들이 자리를 옮겨 거리제 또는 하당제를 지내 대미를 장식한다.


'용대기와 함께 마을 전통 대대손손 이어지길'

신대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해 문화유산이 많은 편이다. 김삿갓의 외할머니 원주변씨의 열녀문이 세워져 있고 100년 넘게 이어져온 산신제와 용대기등, 제문 등이 내려온다. 그리고 김삿갓의 외할아버지 이유수의 99칸 'ㅁ'자 형태의 기와집이 있었다. 30년 전까지 그 기와집에 살았던 정헌국 이장은 "현재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흔적을 찾아 볼수 없게 되었다"며 "이러한 유적을 보존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정헌국 이장은 마을 숙원 사업을 산제당과 더불어 열녀문, 공동우물등 유지보수에 가장 큰 중점을 둔다고 말했다. 현재 열녀문은 도로변에 노출되어 훼손될 위험성이 있을 뿐 아니라 모든 문화유산이 주민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한 실태라고 한다. 이에 주민들과 더불어 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당연한 의무를 지키기 위해 시급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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