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인이 아홉의 지아비를 맞았다는 구슬픈 사연의 '구부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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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인이 아홉의 지아비를 맞았다는 구슬픈 사연의 '구부시령'
  • 유태헌 본부장
  • 승인 2011.04.08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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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헌의 백두대간 종주기] 27구간

올해 들어 본지는 국토의 등뼈를 밟아나가는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ㆍ홍동출신ㆍ홍성고 20회ㆍ손전화 010-3764-3344) 출향인의 백두대간 종주기를 비롯해 산행기를 연재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산행일자 : 2011년 4월 2일~3일
구 간 : 피재 - 건의령 - 푯대봉 - 구부시령 - 덕항산 -환선봉 - 자암재 - 큰재 - 황장산 - 댓재
도상거리 : 26.1km
산행시간 : 10시간 10분 소요 

 

 

 

 



지난번 인원이 줄어서 한 대로 출발했던 버스가, 이번에는 다행히 두 대에 나눠 타고 들머리인 피재에 새벽 03시경 도착한다. 피재는 삼파수, 곧 삼수령(三水嶺)이다. 고갯마루 정점에 떨어진 빗물이 남으로 흐르면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으로 흘러 남해로, 북으로 흐르면 한 반도 중부 내륙의 젓줄인 남한강으로 흘러 서해로, 동으로 흐르면 오십천으로 흘러 동해에 몸을 섞게 된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나 하듯 세 개의 물방울을 연상시키는 상징탑이 세워져있고 그 옆에는 아름다운 정자가 쉬어가라며 객을 맞이하는데 대간길은 정자 옆으로 열린다. 한편 삼척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넘어오는 고개라 하여 피재라고 하였다고 한다. 03시20분 피재를 출발하여 10여분 숲길을 걸으니 임도가 나오고 조금 지나 길은 다시 산길로 이어진다. 우측으로 낙엽송이 울창한 숲길을, 앞만 보고 걷다보면 건의령(巾衣嶺.한의령)에 도착한다.(05시20분)

태백 상사미에서 삼척 도계로 넘어가는 고갯길로 상류의 상사미 마을 주민들이 백두대간을 넘어 오십천 상류의 도계나 고사리에 서는 장을 보러 갈 때 이용하던 지름길이었다. 건의령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이 삼척 근덕 궁촌에서 살해되자 고려의 충신들이 이 고개를 넘으며 고갯마루에 관모와 관복을 걸어놓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겠다고 하며 고개를 넘어 태백산중으로 몸을 숨겼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유서 깊은 고개다. 관모를 뜻하는 건(巾)과 의복을 뜻하는 의(衣)를 합쳐 건의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의령(寒衣嶺)이라고도 하는 건의령을 지나 20여분 후에 올라선 푯대봉(1009m)정상은 대간 길에서 살짝 비켜 있지만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정상에 올라 사진촬영 후 내려오면, 대간 길은 온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오른쪽으로 확(90도) 꺾여 내림 길로 이어지고 고만고만한 서너 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리면 한내령 삼거리에 도착한다.(06시40분)

아침식사를 마치고 1055봉에 오르는 가파른 길 양쪽에는 곧게 뻗은 훤칠한 적송들과 아름다리 참나무 군락지를 지나면서 강원도의 힘이 느껴진다. 몇 개의 봉우리를 지나면 구부시령(九夫侍嶺, 1107m)이다. 한 여인이 아홉의 지아비를 맞이하였다는 구슬픈 사연이 있다. 한편으로는 실제로 아홉의 지아비를 섬긴 것이 아니라 그 만큼 이 고개를 넘나들기 힘들었다는 뜻에서 나온 지명이라는 설도 있다.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서 이렇게 힘든 고개를 오르다보니 힘이 다 빠져서 제대로 사내구실을 못하다보니 아홉 명씩이나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덕항산(德項山, 1070m)에 오른다.(09시경)

 

 

 

 

 

 



덕항산은 태백 하시미와 삼척 신기면과의 경계에 솟아 있는 산으로 옛날 삼척 사람들이 이 산을 넘어오면 평평한 땅이 많아 '덕메기산'이라 하였으나 한자로 표기하면서 덕항산(德項山)이 되었다고 한다. 산 전체가 석회암으로 되어있어 산 아래에는 유명한 환선굴과 크고 작은 동굴이 분포 되어 있다. 덕항산을 지나면서부터 이곳은 마치 추풍령의 중화지구대를 걷는 기분이다. 중화지구대는 평균 고도가 400~500m정도로 나무들이 키가 작고 구릉지가 많으나 이곳의 고도는 900~1000m로 결코 낮은 높이가 아니지만 마을이나 도로가 가깝게 보여서 상대적으로 고도가 낮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이곳의 지형을 동고서저형(東高西低型)이라 한다. 그러나 숲길의 아름다움과 수목들의 생육은 중화지구대와 현저히 차이가 난다. 한 아름이 넘는 소나무와 신갈나무, 키가 큰 낙엽송, 이름 모를 고산 식물들이 자라고 있어서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숲이 아름답고 골이 깊어서 운치 있는 원시림을 걷는 기분이다. 동고서저형인 이곳은 동해 바다가 아련한 동쪽은 한 마리 솔개가 되어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이 산세가 깎아지른 산비탈처럼 직각으로 형성 되어 있고, 서쪽 정선 방향은 마을과 도로가 아주 가깝게 보이는 해발 1000m내외의 고위평탄면이 펼쳐진 첩첩 산줄기로 낮게 보인다. 동쪽의 깎아지른 절벽에 현기증을 느끼며 환선봉(1068m)에 올라 전망대에 서면 환선굴 입구의 주차장이 보이고 그 옆을 지나는 계곡과 도로가 나란히 보인다.

백두대간 분수령 동쪽 고을인 삼척지역에서 발견된 동굴은 모두 54개에 이른다. 특히 덕항산 동쪽 기슭의 대이리 동굴지대(천연기념물 제178호)에는 동양 최대 석회동굴인 환선굴(幻仙窟)과 국내 석회암 동굴 중 가장 빼어난 미학을 자랑하는 관음굴(觀音窟)을 비롯하여 양터목세굴, 덕밭세굴, 제암풍혈, 큰재세굴 등 수 많은 동굴이 숨어 있다. 이중 환선굴은 대이리 동굴지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동굴로서 입구는 15m, 폭이 20m에 이른다. 굴속엔 장님굴새우 등의 희귀 동식물, 아름다운 석순과 종유석, 그리고 오래전 수도승이 기거하던 온돌 터와 아궁이가 남아 신비로움을 더한다. 총 연장 6.5km에 이르는데, 지난 1998년 동굴 중 1.6km가 개방되었다. 환선봉의 옛 이름은 지각산이었는데, 환선굴의 유명세에 환선봉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한편 환선굴 옆에 있는 골말은 우리나라 강원도 산간의 주택 형태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대이리 너와집(중요민속자료 제221호)은 지금의 집주인인 이종옥씨의 11대 선조가 350여 년 전 병자호란 때 경기도 포천에서 이곳으로 피난 와 지은 것이라고 한다. 너와집이란 지붕에 기와나 이엉 대신 얇은 나무판이나 돌판을 덮은 것인데, 이 집은 나무판을 덮었다. 또한 굴피집이란 지붕에 굴참나무 껍질인 굴피를 덮은 집을 말한다. 굴참나무 껍질을 차례로 포갠 굴피집은 물이 잘 빠지고 건조가 잘되며 보기와 달리 수명도 길어 흔히 '굴피 천년' 이라한다. 골말에 있는 굴피집(중요민속자료 제223호)은 300여 년 전 건립된 것이다. 환선봉에서 울창한 낙엽송 숲을 지나 내려서면 안부에 넓은 헬기장이 있고, 봉우리 하나 넘으면 자암재에 이른다. 이곳에서 30여분 걸으면 고랭지 채소밭을 만난다. 광동댐 건설로 이곳으로 이주해온 농민들이 수십 만 평의 산을 일구어 밭을 개간한 곳으로, 무척 힘들었겠다 싶은 것은 아직도 밭에는 돌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광활한 채소밭이 끝나는 곳에서 큰 길로 내려서자 큰재에 이른다. 큰재에서 왼쪽 길은 하장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대간길은 똑바로 낙엽송 숲 속으로 이어지는데 댓재까지는 아직도 5km 남아 있다. 산딸기 가지들이 발길을 더디게 하는 잡목지대를 지나고 GPS수신을 돕기 위해 국립지리원에서 정상의 나무들을 베어낸 황장산(1059m)정상에 오른다.(12시경) 누군가 세워 놓은 정상석 표지석은 초라하지만 황장산 정상에서 북쪽으로는 다음 구간인 두타산이 위엄을 보이며 서 있고, 동쪽으로는 댓재로 올라오는 424번 도로가 뱀처럼 구불구불 보이며, 뒤돌아보니 방금 지나온 1105봉이 멀리 보인다. 황장산 동쪽 미로리의 활기리 능곡에 있는 준경묘(濬慶墓)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양무 장군의 무덤이다. 바로 조선 개국을 합리화하고 통치자로서의 임무를 밝힌 [용비어천가] 첫 장에 등장하는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다. 그는 전주에서 살 때 산성 별감과 기생을 사이에 두고 다투다 사이가 나빠지자 처가인 이곳으로 피해왔다.

목조는 활기리 산골에 이주하여 1년 뒤 부친상을 당하자 백우금관(百宇金棺)의 전설을 남기고 현재의 위치에 장사 지냈고, 모친이 사망하자 동산리에 장사 지냈다. 그런데 전주에 있던 산성 별감이 삼척으로 부임한다는 소문을 듣고 추종자 170여명과 함께 함경도로 이주해 여진족의 천호(千戶)벼슬을 하였다. 이곳 민가에서는 처갓집 소를 잡아 산신제 제물로 쓰고 소를 돌려 줄 수 없어 도피하였다고 전한다. 세월은 흘렀고, 목조의 뒤를 이어 익조, 도조, 환조, 태조가 태어나며 양무 장군의 무덤은 점차 잊혀졌다. 이성계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왕위에 오른 뒤 음덕에 보답하기 위해 양무 장군의 무덤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다 세종 때 겨우 무덤을 찾아낸 뒤 성종 때 봉분을 보완하다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여러 논란으로 공사를 중지했다. 그리고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던 1899년에야 겨우 지금의 규모로 수축했다. 그러나 이미 풍수의 약발이 다 떨어졌던 것일까. 얼마 뒤 조선의 멸망과 함께 왕실도 무너지고 말았다. 민가에서는 당시 양무 장군이 임기응변으로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조선 왕조가 그렇게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준경묘의 진정한 보물은 누가 뭐래도 100년 이상 된 금강솔들이 20~30m 높이로 장대하게 뻗어 있는 숲이다. 환경단체인 '생명의 숲'은 '아름다운 숲 전국 대회'에서 준경묘 금강송림을 '가장 아름다운 숲' 수상지로 선정하기도 했다.

준경묘에서 4km쯤 떨어진 하사전리의 영경묘(永慶墓)는 양무 장군의 부인이 묻힌 곳이다. 이곳 역시 준수한 금강송림이 눈길을 끈다. 또한 7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가다 마읍천을 건너면 이름도 무시무시한 '살해치'가 있다. 백두대간의 건의령 유래에서 들었듯이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과 두 왕자가 살해되었다는 곳이다. 근처에 무덤이 조성되어 있는데,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은 공양왕, 그 옆은 왕자, 나머지는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 무덤이라고 전한다. 그런데 공양왕이 묻혔다는 능(陵)은 이곳을 포함해 고양시 원당동, 고성군 간성읍 금수리 이렇게 세 곳이다. 어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이는 공양왕이 교살된 후 신원 확인을 위해 목을 잘라 머리만 가져가고, 몸은 이곳에 묻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설득력있게 들린다. 이렇듯 각 지역 진위 여부를 떠나 나라 잃은 임금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처럼 삼척은 고려의 멸망과 태조 이성계의 조선 개국이 공존했던 역사적인 고장이다. 조금 내려오면 무명봉에 이르고, 아직 동상이 완쾌되지 않아 불편한 몸으로 참석한 배천석님이 마중 나와 반가이 맞아준다. 함께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산죽들이 군락을 이루는 하산길을 내려서면 대나무가 많아 이름 지어진 댓재에 도착한다.(12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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